고사 위기에 처한 언론이 안쓰러워 끄적이는 단상
10년 전. 텔레비전 방송국 첫 입사였다. 선배들 통해 방송 ABC를 배웠다. 후배로서 해야할 일과 선배로서 해야 할 일 비슷한 것들을 배운 것 같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언론사 속 '기능인'으로만 살면 안 된다는 점도 알게 됐다는 점이다.
업계에서 흔히 반쯤 푸념조로 '우린 말공장 노동자'란 표현을 쓰곤 한다. 매일 생산되는 뉴스 소스를 가공해 시청자 앞에 내놓는 일련의 작업은 기실 컨베이어 시스템 마냥 정형화돼 있다. 이렇게 정형화된 루틴은 효율성을 증대시킨다. 하지만 너무 언론인을 루틴 안에 가두면 구성원의 창의성이 죽는다. 방송국 개편 시기엔 늘 상향식 아이디어 보단 하향식 교시가 주를 이룬다. 직제를 개편할 때도 아이디어는 늘 하향식이다. 승진이나 특종, 프로그램 대박 외엔 딱히 인센티브가 없는 언론 노동자 입장에선 슬슬 보도를 생산해온 기존 루틴 안에서 기능인으로 머문다. 딱히 목소리 내봐야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루틴에 찌든 말공장 노동자가 견제의 대상인 권력과 교탁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기차를 철로 위에 올려두면 쉬 앞으로 가지만 멈추거나 방향을 틀어야 할 때 제3의 기준이 등장하면 문제가 터진다. 예를 들어, 앞에 사람이 있어도 권력의 외압 때문에 멈추지 않아 인명피해를 낼 수 있다. 사회의 근간이 흔들려 온 국민이 광장으로 튀어나와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과거 엄혹한 시국 속에 언론이 걸어론 길을 보면 대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다녔던 그 말공장은 다분히 자본 권력에 영향 받고 정치 권력에 타협적이었다. 하향식 교시와 명령이 쉴 새 없이 하달됐다. 보도국장이 새파란 직원들 다 보는 사무실에서 부장급 직원을 모멸찬 상욕으로 공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취재를 무기 삼아 권력자의 사생활을 압박하기도 했다. 공장 직원들은 다 알면서도 이러한 만행들을 쉬 거스르지 못했다.
밥줄이니까.
사람이 밥줄 걱정하며 의로운 일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아 내 언젠가 저럴 줄 알았다' 싶은 소식을 들었을 때 떠올랐던 생각이다. 그곳은 태생부터 대부분의 간부가 늘 그런 식이었다.
언론사 직원 한 명 한 명은 각각 언론 기관에 해당한다.
암울하다. 업계의 미래는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언론사는 경영난에 허덕인다. 언론인 한 명 한 명을 오롯이 건사하기 어려워지는 중이다. 몇 방송국, 신문사의 인수합병 뜬소문은 불안하게 시중을 떠돈다. 역사는 그랬다. 기술 발달로 인한 혼란과 과도기를 거친 뒤엔? 늘 혁명이다.
조금 더 투명하게, 조금 더 탄탄한 '외압 방화벽'을 구축한 그런 회사여야 민주 사회에서 언론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성큼 왔다. 그건 너무 힘들다. 국민의 눈높이는 이미 높아졌고 언론에 거는 기대는 극히 낮아졌다. 출발점은 여기다. 말단 직원부터 경영자까지 언론으로서의 시대정신으로 한방향 정렬한 뒤 촘촘한 방화벽을 구축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래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 구성원이 다종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지녔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업물을 내놓을 수 있다면 이보다 막강한 창의성이 또 어딨겠나 싶다. 그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는 결정권자, 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언론사는 기술 발달에 따른 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서도 시청취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