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이민 온 이유를 자세히 알려주는 이유

이민가정 자녀들의 정체성 혼란을 막으려면? ep.1

by 정병진
'아이들 정체성 (형성)도 다뤄주실 수 있나요?'

최근 SNS를 통해 받은 질문입니다. 한국 아이들이 독일에 이민 온 뒤 느끼게 될 '정체성의 혼란' 같은 주제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도 아내와 미리 이야기를 꽤 많이 나눴던 주제입니다. 그래서 독일에 오고 나서 특히 이민 가정 부모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요.

여러 개념이 접목된 주제라 풀어낼 이야기가 많지만.. 저희 부부는 굵직하게 신앙적 관점(개신교 세계관)과 인문적 관점에서 아이들의 건강한 정체성 형성을 돕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문적 관점만 다뤄보도록 하지요.



파싱 이벤트 때 제각기 변장한 딸아이 반 아이들



학교에 가면 생김새도 다르고 모국어도 제각각인 독일. 아이들이 행여나 정체성의 혼란으로 멘탈이 무너지진 않을까 염려되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이 혼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가 되겠지요.

이민 이유에 관해 자주 대화해요​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저와 아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게 있습니다. 바로 이민의 명분입니다. 저희는 아이들과 이민의 명분에 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눕니다. 왜 여기에 왔는지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최대한 자주 말해주고 의견을 듣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한국에서 정말 치열하게 살았단다. 그런데 그 노력에 들일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틀면 우리가 더 가치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Geschwindigkeit)보단 방향(Richtung)이라고 아이들에게 늘상 강조해왔습니다. 독일 이민은 바로 그 방향 때문이며, 엄마 아빠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에 비춰봤을 때 독일이 가장 적합한 나라라고 판단했다는 명분을 꼭 짚어줍니다.

그 가치관을 조금 더 뜯어보면:

1. 사회민주주의적 제도와 정책이 자본주의와 맞물려 조화를 이룰 것

2. 다양성이 용납되고 사회적으로 포용될 것

3. 시민의 권익이 보장될 것

4. 노력하면 충분한 보상이 따를 것

5. 민주주의와 역사 교육에 관한 저변이 확충될 것

당장 이민을 꿈꾸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유럽 국가 중 독일이 제일 선진국이고 이민자에게 가장 열린 나라라는 점이 1차적으로 이목을 끌었습니다. 대학원을 가더라도 영어권 국가 대비 학비가 저렴하고 킨더겔트 등 복지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점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근저에 저와 아내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결이 독일과 제법 포개진다는 점이 깔려 있었습니다.

다양성이 용납되는 사회인 독일에서 성장하면 독일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아이들이 꿈을 펼칠 수 있을 거라는 점에 관해 아이들과 자주 대화를 나눕니다.

특히 언어 차원에서 메리트가 큰데요. 한국어와 독일어는 디폴트고 영어를 제1외국어로 구사할 수 있게 된다는 점, 그 외에 불어나 스페인어 등 구사 가능 언어를 쉽게 늘려나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본격적으로 찾아나갈 때 천혜의 환경이 되어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수일텐데 그건 불가능하고, 대신 이민을 통해 그런 기회들을 잡고자 했다고 진솔하게 말해줍니다.





또한 독일이 역사적 과오를 끊임없이 인정하고 자성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나라라는 점도 아이들과 이민의 명분을 이야기할 때 꼭 짚어줍니다. 왜 학교 생활이나 일상에서 히틀러라는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지 않는지, 슈톨퍼슈타인을 볼 때 어떤 기분이 드는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엄마, 이 집에선 5명이 끌려갔어"

이 나라의 몇몇 위정자가 주도한 비극적 역사를 아이들에게 자세히 알려주고, 우리가 태어난 한국에서도 일본의 몇몇 위정자들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와 결부지어 자연스레 한국의 역사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독일은 일본과 달리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음을 짚어줍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성찰이 나라의 정책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독일 시민으로 산다는 건 응당 여러 시사점이 있다는 겁니다.

자연 환경도 결정적 이유 중 하나입니다. 독일은 어딜가든 무성한 나무와 공원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국 수준의 미세먼지가 없어서 숨쉬기 정말 좋습니다. 한국에선 막내 아이가 늘 모세기관지염을 달고 살았습니다. 독일에 가려고 아이 항생제 좀 많이 처방해달라 했더니 "독일 가시면 싹 나을 거에요"라며 웃으시던 서촌 연세소아과 원장쌤의 미소가 사뭇 떠오릅니다. 마법처럼 모세기관지염 비슷한 증세 하나 없이 막내 아이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답니다.

저 역시 한국에서 숨 쉬기 어렵고 늘 호흡기 질환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독일에선 숨통이 탁 트이고 숨 쉴 때 너무 편안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자주 나눕니다.

"나도 독일에 온 게 좋은 거 같아. 소피아 같은 단짝 친구도 만나고 학교에서 재밌게 놀면서 공부도 하고, 자연도 너무 좋구!"

아이들이 납득할 만한 이민의 명분이 또렷할수록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지?' 같은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럼 '나는 누구?'로 이어지는 혼란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다음 포스팅에서 다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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