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은 자아정체성에 직결되는 주제입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더듬어가는 과정은 비단 이민가정 자녀들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한국이든 전 세계 어디서 살고 있든, 누구나 자연스레 품을 수밖에 없는 일생의 철학적 고민입니다.
따라서 이 포스팅에서는 그 근본적 고찰은 논외로 하고, 이민가정 자녀들이 새로운 나라에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정체성 혼란의 순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같이 공유해봅니다.
외모 안심시켜주기
자녀들이 이민 국가에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될 당혹스러움은 단연 각기 다른 외모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이 허들을 먼저 다뤄야 합니다.
아이들이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외국인을 봤다면 얼마나 많이 봤을까요? 한국에서 쭉 살아왔다면 아마 손에 꼽을 겁니다. 다양한 인종과의 '접촉 빈도'가 낮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느 날 낯선 독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로썬 얼마나 느낌이 이상하고 긴장될까요.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 하나하나가 너무 부담스럽고, 얼른 이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을 겁니다.
우선 이민 오시기 전부터 독일인과 터키인, 프랑스인과 영국인 등 앞으로 자주 접하게 될 유럽인 사진을 많이 보여주세요. 이들도 나와 같은 사람일 뿐이고 생김새가 아시아인인 나와 다를 수 있구나, 다른 게 당연하구나,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우리 아이의 이국적 외모 때문에 예상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딸아이가 뉘른베르크에서 처음으로 홀로 학교에 들어가기 전, 다시 한 번 저는 딸아이에게 '아이들이 널 유심히 쳐다볼 수 있다', '칭챙총 혹은 고니찌와 거리며 말을 걸어올 수 있다' 등등 예상 가능한 이슈를 충분히 묘사해주었습니다. 그래야 딸아이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상황에 마음으로 대비할 수 있으니까요. 실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아이가 당혹스럽지 않습니다.
"네가 한국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인을 처음 보는 이 동네 아이들은 네 생김새가 퍽 신기할거야.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그러니 너도 '친구들이 내게 관심을 갖는구나, 감사하다'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건 어떨까?"
겉모습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제각기 다른 출생지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이니 모두 다르단다. 잘 안심시켜주세요. 다른 거지 틀린 게 아니니까요.
조그마한 재능에도 큰 의미 부여하기
아이가 초등학생 이상이라면 아이의 작은 재능에 큰 의미를 부여해주세요. 다른 아이들과 소통할 때 그 재능을 어떤 모양으로든 발현할 수 있다면 아이가 스스로 건강한 자존감을 구축해가는 토대가 되어줄 겁니다.
'아,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내 작은 재능이 여기 친구들에게도 먹히는 구나' 이런 효능감이야말로 아이가 자기 정체성을 타국에서 스스로 찾아가는 첩경입니다.
저희 딸아이는 그림 그리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말이 잘 안 통하는 답답한 상황에 처하면 아이들에게 그림 선물을 줘보길 제안했습니다. 예쁜 호의를 마다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우와, 결아 너 정말 그림이 살아숨쉬는 것처럼 그린다. 이거, 만약에 너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아직 말이 잘 안 통할 수 있잖아. 그때 그림으로 네 마음을 표현해주는 건 어떨까?"
3년여 세월이 흐른 요즘, 저희 딸아이는 남사친과 커스터마이징 꾸미기 노트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2유로에 판매를 하고 있답니다;;;; 딸아이가 아이패드로 도면을 그리면 남사친 녀석이 제작을 하는 프로세스죠.. 재미로 샘플들을 여기에 올려봅니다.
축구, 농구, 탁구, 달리기, 자전거타기, 블럭쌓기 등등 아이의 소소한 재능을 소통의 무기로 키워주세요. 아이의 정체성 혼란을 능률적으로 막아줄 겁니다.
제법 근사한 삶을 시작한다는 인식
정의(definition)은 비교와 대조를 통해 완성됩니다. 이 명제를 이민가정 아이의 정체성 토픽에 작용해볼까요?
한국이란 나라와 독일이라는 나라를 직간접적으로 비교하게 될 우리 아이.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직 머릿속에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민 경험부터 훅 들어오는 셈입니다.
자연스레 '나라라는 건 땅인가?', '다른 외양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장소인가?', '나는 한국 사람인가 독일 사람인가?' 같은 개념적 궁금증과 혼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아이에게 국가, 체류허가, 영주권, 시민권 등의 개념을 자분자분 가르쳐주세요. 한 번에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합니다.
계기가 있을 때 자연스레 알려주면 좋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넘어올 때 공항에서 전광판 속 여러 국적기와 목적지 등이 표기됩니다.
"오, 저 비행기는 우리가 가는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우리가 태어난 한국으로 간다. 거기에는 잠깐 휴가 때 쉬려고 가는 사람도 있을테고, 우리처럼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치?"
-"응"
"그럼 독일에서 태어나서 한국 여권이 없는 사람이, 그러니까 독일 사람이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까?"
-"음... 집? 돈?"
"그래 맞아, 집과 돈이 있어야 하지. 그런데 집과 돈만 있으면 충분할까? 사실 한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오래 지낼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질문과 대답을 이어가며 자연스레 국적과 체류 허가 같은 개념을 알려줍니다. '우리 내일 외국인청에 갈 거야' 하면서 체류허가를 신청하거나 현장에서 수령할 때, 아이에게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한국인이고 한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이며 독일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독일에서 오랫동안 살게 될 거라고요.
자녀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더 어릴 때 이민 온 케이스라면 '네가 김나지움 졸업하기 전쯤 시민권을 얻게 될 거야'라며 독일 시민으로서 투표까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투표가 뭐야?' 아이가 질문하면 자연스레 대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 같은 개념을 일상의 언어로 자분자분 풀어줍니다.
포인트는 어른들이 이민에 필요한 행정 처리를 할 때 아이에게도 상황을 충분히 공유하는 겁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넘어왔다'는 개념을 진지하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근사한 Einwander*innen이자 우리가 선택한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글로벌 시민이라는 개념을 아이들에게 알려주세요. 좀 거창하게 들릴지라도 말이죠 ㅎㅎ
그래야 아이들도 자기 자신이 제법 근사한 부모님과 함께 뭔진 모르지만 좀 느낌 있는 그런 삶을 살기 시작하는 거구나, 하는 자부심을 어슴푸레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한 나라 'Wahlheimat'
태어난 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없으나 살아본 뒤 내가 다른 나라를 선택해 살아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독일 단어 Wahlheimat는 바로 '내가 선택한 고향'이란 개념입니다.
저희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대한민국이고 장단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최대한 자주 자세히 알려줬습니다.
나아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에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갖게 된다, 이 국적은 버릴 수도 있고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개념을 잡아줬습니다.
하지만 저와 아내는 한국 국적을 버릴 생각이 없고, 아이들이 여러 선택권을 갖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큽니다. 삶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서 끝없이 C(choice)를 해나가는 과정이니까요. 그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 수록 아이들 삶은 퍽 다채로워질 겁니다.
따라서 우리의 태어난 고향은 한국, 우리가 선택한 고향은 독일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독일을 베이스캠프 삼아 이태리든 아프리카 알제리든,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 혹은 영국이든 노르웨이든 간에 또다른 Wahlheit 내지 일 할 곳, 즐길 곳을 선택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당장 아이들은 그게 어떤 개념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넘나들며 휴가를 몇 번 다녀와 보면 사실상 섬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 개념을 잡아가게 됩니다. 그 이론적 토대는 부모가 쌓아줘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언어는 한국어 > 독일어 > 영어
마지막으로 언어입니다. 집 안에서는 한국어를 씁니다. 우린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니까요. 밖에서는 독일어를 섞어 씁니다. 독일은 우리가 타국에서 살기로 처음 선택한 Wahlheimat이니까요. 그리고 밖에선 영어도 혼용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독일에서'만' 살기 원하는 부모님은 아마 없겠죠?
제 대학 동기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저랑 같은 학부를 나오고 싱가포르 페이스북에 취직, 싱가포르 남편과 결혼 및 출산, 한동안 잘 살다가 독일 지멘스로 이직해 여기서 집도 사고 잘 정착, 그러다가 남편의 미국 발령으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역시 잘 살고 있습니다. 독일에 사놓은 집이 있어 가끔 독일에 엉주권 소실 방지차 들어오는데, 꽤 '선택하며 사는 삶'을 잘 살아가는 중입니다.
제 회사 동료 중에는 남미 어느 국가에서 출생, 한국과 캐나다에서 청소년기, 한국 대학 졸업, 뉴욕대 석사, 독일 석사, 독일 의류 회사, 페이스북을 거쳐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탈리아나 네덜란드 출신 동료들 이야기 들어보면 한 국가에서 쭉 살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너 그때 우리 차 태워준 이모랑 그 집 남자애 기억나지? 이번에 미국 가더라"
자신이 살아갈 곳을 선택해 살고 있는 다양한 선례를 아이에게 청사진처럼 보여주세요. 말씀해주시고요. 집 안이라면 한국어로, 바깥이라면 독일어나 영어로 대화해주세요.
이 정도 하면 아이들도 정체성 혼란이 오지 않습니다. 저는 일단 어른인 제 자신부터 그런 혼란이 안 오더라고요 ㅎㅎ
그러면서도 명절이 되면 꼭 이렇게 한복을 차려 입고 가족 사진을 찍습니다. 가족과 소중한 지인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자연스레 우리의 뿌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기 위함입니다.
한국의 예법, 독일과 웨스턴의 매너 등을 계기가 있을 때마다 가르쳐주고 같이 즐긴다면 이민가정의 아이들이 '난 누구지?' 하는 혼란으로 고통받지 않을 거라 조심스레 확언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