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알록달록하다'입니다. 국적과 성별, 문화와 역사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는 베를린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곳곳에 서려 있기 때문일까요.
요 알록달록한 베를린에서 붉은색을 콘셉트로 잡은 한국 화가의 전시회가 열려 주말에 다녀왔습니다.
바로 이세현 작가의 독일 첫 개인전이었습니다. 작은 그림부터 큰 그림까지 붉은색으로 표현된 산수화가 인상적인데요. 하나하나 톺아볼까요?
해골은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 앞에는 꽃이나 나무가 자리했습니다. 삶과 죽음을 극적으로 대비시켜버리는데요. 은근한 해학도 묻어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줍니다.
위 두 번째 사진은 해골 앞 바위가 마치 '좋아요'를 연상시키지 않나요? 따봉! 영화 <터미네이터>의 유명한 용광로 입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세현 작가는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북한의 모습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마 최전방 G.P. 근무를 하시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저도 이라크 자이툰 파병 당시 야간 경계 근무를 하며 야간 투시경을 사용해봤는데요. 보통 회색 아니면 녹색으로 보입니다. 영화에서 보던 그 단조로운 느낌이 나죠. 거기에 작가는 붉은색을 덧입혔습니다. 베를린에서 만난 베르멜 폰 룩스부르크 갤러리 큐레이터에 따르면 푸른빛 그림들도 많은데 작가의 주된 색깔 콘셉트가 붉은색이라고 합니다.
유토피아 × 디스토피아
작가의 작품에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상징하는 장면들이 콜라주 형식으로 등장합니다. 콜라주 형식으로 장면 장면을 따오는 방식인데요.
유토피아 장면은 해변의 여인들, 행복한 모습의 가족들로 치환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눈길을 사로잡는 건 다름아닌 아이유!!
커다란 그림 상단에 털썩 앉은 여자 아이 모습이 보이시나요. 가수 아이유 님의 어린시절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이유는 유토피아인 거죠. 작가님이 뭘 좀 아는 분이었습니다.
마치 미드 <기묘한 이야기>에서 현실과 괴물의 세계가 맞닿아 대비되는 장면과 흡사한 기술로 유토피아적 남한, 혹은 웨스턴들의 모습과 디스토피아적 북한의 모습이 데칼코마니 형식으로 표현됐습니다.
유토피아적 모습을 해변의 여인들, 웨스턴 가족이나 어린이들,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남한 아이들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 점은 제가 이해를 잘 못한 것인지, 아니면 대중적이고 직관적인 기호를 작가님이 일부러 가져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작품이 대체로 직설적인데 바로 이런 상투적일 수 있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산수화로 돌아가보죠. 산등성이에 정자가 많고 물가에는 등대가 꼭 등장합니다. 정자는 죽음과 생명,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가 대비되는 작금의 현실을 자연 속에서 고아하게 관조해보자는 작가님의 제안 같았습니다. 관람객에게 내미는 손 같았달까요.
'잠깐 여기 앉아 한숨 돌리면서 저기 저 풍경들 좀 같이 보실까요?' 하는 느낌입니다.
그럼 등대는 왜 자꾸 등장할까요. 지금 이렇게 펼쳐지고 생동하는 극적인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방향을 가리키는 게 우리네 인생선이 좌초하지 않을 항로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뜻 아닐까요?
이 거대한 작품 속 안중근 의사 등 역사적, 정치적 인물들을 보면 작가의 방향성은 이러하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