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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Feb 13. 2024

아들3

춤바람

"야, 정신 똑바로 차려잉. 그냥 저기하면 원양어선 끌려 가는 겨"


통일호 밤기차를 타고 찾은 동대문은 별천지였습니다. 길거리에는 오징어배 불빛처럼 할로겐 조명을 강하게켜놓은 노점상들이 핫바, 감자튀김을 겉에 붙인 핫도그 같은 진귀한 음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껏 고등학생처럼 멋을 부렸지만 중학생 티를 벗지 못했던 우리는 '무서운 형들'한테 잘못 걸려 두들겨 맞거나, 어디에 납치돼 원양어선에 팔려갈 까봐 가시를 잔뜩 세운 고슴도치처럼 동대문 상가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구제 힙합바지는 평화시장에서도 여기 형님 네가 제일 깔삼혀"


대천에서 서울로 전학 온 친구 녀석이 미국에서 물 건너온 중고 구제 바지를 주로 취급하는 젊은 사장님과 제법 유대를 쌓아놓은 덕에 시골에서 올라온 우리는 도매가 보다 조금 더 쳐서 구제 옷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배드보이(Bad Boy)나 에이리언, 타미(Tommy)에서 나온 힙합 스타일 의류가 인기였는데, 물 건너온 구제 옷들은 다 처음 보는 브랜드였거나 옷 마감 처리, 끝단 처리가 유행하는 것들과 달랐습니다. 그런 바지를 입고 롤러장에 가거나 대천 시내를 쫙 활보해주면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갔지요. 그게 뭐라고 말입니다.


아, 서울 갔다온 다음 날은 친구들과 돈을 모아 서울에서 사온 던킨도넛을 교실에서 먹어주는 스웨그를 선보여야 했습니다. 지방에서는 던킨도넛을 구할 수 없었거든요.




힙합바지는 제가 초등학교 5~6학년이던 96년, 97년 경 이미 1세대 아이돌 HOT나 젝스키스의 영향으로 유행했던 패션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김수용 씨의 만화 '힙합'이 출시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제가 살던 대천은 만화책 출시 후 거의 1년이 다 돼서야 '힙합' 만화책이 전해졌는데요. 당시 아이돌 그룹 '영턱스 클럽'의 김성은 님이 브레이크댄스 기술인 원킥, 투킥에 나이키, 그리고 토마스라는 기술까지 공중파 방송에서 선보이며 전국적으로 힙합 열풍이 불기 시작한 해였습니다. 85년생들이 중 1때 무렵이었습니다.



 플레이그라운드로 제작한 AI 이미지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쪽과 강당에서는 어김없이 춤판이 벌어졌습니다. 브레이크댄스 입문자들은 원킥, 투킥부터 시작합니다. 두 손을 뒤로 뻗어 땅을 짚으면서 동시에 한 다리를 가슴팍까지 팍! 차주면 원킥, 두 다리를 동시에 땅에서 떼어 가슴까지 시원하게 차주면 투킥이었습니다. 가장 고난도 킥은 땅에 한 손만 짚고 두 다리와 한 팔을 동시에 하늘 위로 뻗어주는 쓰리킥이었죠. 제가 다닌 중학교는 나무 난로를 뗄 정도로 건물이 전통(?)을 자랑했는데요. 바닥이 나무로 돼 있었기에 저와 친구들이 땅 바닥을 세게 찰 때면 간혹 바닥 나무가 부서지는 불상사가 발생 했습니다. 체육 선생님께 끌려가 빠따(야구 배트의 속어) 맞기에 딱이었죠.


흥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저와 친구들은 그래서 밤마다 야외 강변에 모였습니다. 대천은 그 이름처럼 도시 중간을 대천천이란 강이 가로지릅니다. 강둑에 하상주차장이 조성돼 있어, 밤마다 각 중학교의 춤 좀 춘다는 녀석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콘크리트 바닥이었으니 중학생들의 대찬 발길질에도 끄떡 없었지요. 대신 장판을 잘라서 가져오지 않으면 손바닥이나 무릎, 등짝에 스크래치가 나기 일쑤였습니다.


남중 아해들의 춤판이 벌어지면, 여학생들도 모이기 마련입니다. 시내의 2개 여중 학생들, 여고 누나들이 우리가 벌인 춤판을 완성해주었습니다. 네, 관객이 없으면 흥이 또 안 나는 법이지요. 특히 제가 다닌 대명중 아해들과 라이벌 중학교인 대천중 1살 위 형들이 춤 대결을 벌일 때면 대천 하상 주차장은 구경꾼들로 불야성을 이뤘습니다. 이른바 쇼다운(show-down)으로 불리는 댄스 배틀입니다.



플레이그라운드로 제작한 AI 이미지



저는 배틀 초반 킥을 담당했습니다. 원킥과 투킥, 나이키 중에서 '세미'라는 기술의 폼이 좋았습니다. 춤 기술이 성공하면 '꽂았다', '꽂혔다'는 표현을 쓰는데, 어느 날은 쓰리킥을 꽂아버리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초반 기선 제압 성공! 여학생들이 유난히 많았던 그날은 허리에 무리가 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리듬에 몸을 맡겼던 마지막 잠이었습니다.


무리 중에서도 가장 춤을 잘 췄던 4~5명의 친구들은 '임폴스'라는 지역 댄스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대천 시민체육관을 통째로 빌려 정기 공연을 갖는 등 대천에서는 여느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몸이 더이상 따라주지 않았던 저는 그사이 춤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친구들이 공연할 때 사회를 봐주거나 꽁트에 참여하면서 추억을 만들어갔죠. 서울에 올라가 동대문 밀리오레 앞 야외무대에서 서울 애들 못지 않은 춤 실력을 임폴스 친구들이 뽐내주면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소속 연예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매니저 실장님들의 마음이 이랬을까요?


원양어선에 끌려갈 까봐 노심초사하며 동대문을 기웃거리던 기억, 밀리오레와 두타 옷가게 형들의 '삐끼' 행각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나만의 개성 아이템을 물색했던 그날의 설익은 열정들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싱그러운 영감을 주곤 합니다. 그때 그 서울에서만 구할 수 있었던 옷들을 싸게 매입해 대천에서 팔았다면 저와 제 친구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뭐 이런 생각들을 헛헛하게 만지작 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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