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1시면 아들이 수업을 마치고 학교 밖으로 나옵니다. 여느 때처럼 아이를 기다리던 어느날, 아이가 10분이 넘도록 안 나오더라고요. 무슨 일 있나 싶어 교실로 올라갔는데 교실 문 앞에서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오는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뭐 하느라 이제 마쳤어?” “어, Tafeldienst 하고 오느라 늦었어요” Tafel은 독일어로 칠판입니다. 수업 마치고 칠판 주변을 아이들이 다같이 정돈하고 나와야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그날 유독 먼저 뿔뿔이 사라진 겁니다.
저는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너도 그냥 안 하고 나가고 싶지 않았어?“ 짐짓 뜸을 들이던 아들은 저랑 나란히 집으로 걸어가며 덤덤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나도 집에 빨리 가고 싶었지만.. 내가 해야 되는 일이니까요“
아이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아이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줄 안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늘 저희 아이들에게 ‘너희가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내가 누구고 여긴 어디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항상 깨어 생각하라’고 당부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건데요. 아들이 스스로 자신이 이 반 학생이고, 이 교실을 쓰는 아이라면 수업 마친 뒤 칠판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는 조그마한 본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저는 아들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책임을 다할 줄 아는 아이라면, 더 큰 일을 맡더라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어른으로 크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절제력입니다. 머리론 알아도 몸으론 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요. 귀양 살이하던 다산 정약용 선생도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셨기에 한시 ‘보리타작’을 쓰셨을 겁니다. 매해 추수철 되면 어김없이 보리타작 하던 농민들을 바라보며 다산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새로 거른 막걸리 젖빛처럼 뿌옇고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네
옹헤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삽시간에 보리 낟알 온 마당에 가득하네
주고받는 노랫가락 점점 높아지는데
보이느니 지붕 위에 보리티끌뿐이로다
그 기색 살펴보니 즐겁기 짝이 없어
마음이 몸의 노예 되지 않았네.
낙원이 먼 곳에 있는 게 아닌데
무엇하러 벼슬길에 헤매고 있으리요.
이 시의 백미는 역시 ‘마음이 몸의 노예되지 않았네’입니다. 몸의 유혹은 강합니다. 쉬고 싶고, 나도 그냥 집에 가고 싶고 놀고 싶습니다. 아기일 땐 100% 용납되는 마음입니다. 분명한 건, 내 몸이 가는 데로만 사는 어른은 타인에게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아들은 몸의 노예되지 않고 마음을 지킨 작은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굉장히 크게 칭찬해줬습니다. 아이가 ‘이게 맞는 거구나’ 효능감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Takis라는 독일 초등학생 인기 과자를 그날 두 봉지나 선물했습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고, 마음이 육체의 노예되지 않는 무해한 할아버지가 저와 제 아들을 향한 장래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