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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버스서 멱살이 집히다

by 정병진

버스 타고 귀가 중이었습니다. 저는 버스 우측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죠. 자리가 비좁고 계단을 한 칸 올라 앉아야 하는 자립입니다. 뒤에는 노약자석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상파울리라는 다소 험악한(?) 동네 정류장에서 한 노파가 탑승했습니다. 얼굴과 머리는 새하얬고, 눈의 총기는 사라진 어르신이었습니다. 어련히 편안한 노약자석에 앉으시겠거니 생각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데 느닷없이 멱살이 잡혔습니다.


그 노파였습니다. 악력이 강해 흠칫 놀라는 찰나 “내 자리야, 내 자리야” 궁시렁대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에 초점이 없으셨으나 시력을 잃으신 것 같진 않았습니다. “할머니, 노약자석 자리가 많ㅇ… 악“ 할머니는 전광석화 같이 저를 끌어내고 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무례했고 황당했으나, 상대가 너무 할머니셔서 제가 자리를 옮겼습니다. 버스 안에 있던 다른 독일인들은 ‘니 맘 안다’하는 웨스턴 특유의 미소를 띠며 저를 바라봤습니다.


아내가 눈이 건조하고 염증이 심해 안과에 다녀왔습니다. 금요일이었고 약국에서 약을 짓는데, 그 약은 금요일 밤에 조달 가능했습니다. 나이 지긋한 약사 할머니께서 ”혹시 오늘 밤 10시에 잠깐 약국으로 올래요? 어서 눈약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밤에 오면 내가 챙겨줄게요“ 칼퇴근 문화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독일입니다. 약사님이 아내를 위해 금요일 밤늦게 약국에 다시 와 문을 열어주신다니요. 푼푼한 약사님 마음에 아내는 마음이 좋았답니다. 그러더니 아내의 무릎까지 올라오는 스웨터 같은 어그부츠가 멋지다며 다른 약사 님들과 함께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제가 약을 수령해왔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두 어르신들 차이가 뭘까 싶었습니다. 삶의 스펙트럼이 너무 다르겠죠. 본질적으론 공감 능력 아닐까 싶습니다. 타인 입장에서 생각해보려는 시도,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넉넉한 정서 말이죠.


공감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관찰하고 곱씹는 태도는 그 첩경입니다. 시인들의 전문 영역이지요. 안도현 시인은 살아있는 게로 장을 담그는 간장게장 제작 과정을 천천히 관찰하며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꽃게에까지 울컥울컥 먹먹한 마음으로 공감하려 한 시인 만큼은 우리가 흉내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저런 태도로 일상을 산다면 삶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요. 적어도 버스에서 사람 멱살을 잡고 끌어내거나,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유해한 노인이 되진 않을 테지요.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무해한 할아버지가 제 장래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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