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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

by 정병진

방 정리 중 우연히 장모님께서 생전에 쓰셨던 수첩을 발견했습니다. 아내가 독일까지 챙겨온 엄마 유품이네요. 사업 고민 흔적, 가족과 주요 인사들의 이름,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혔습니다. 제 이름도 보이네요. 한국에서 쓰던 휴대전화 번호와 제 생일입니다. 존경하던 장모님께 인정받은 듯해 사뭇 뿌듯했습니다.


장모님은 48세 되던 해 사찰에 들어가 공부하셨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아직 복덕방 개념이던 시절 기업 마인드로 고객들을 컨설팅 하셨고, B2B 비즈니스에 집중해 부산 해운대 상가 부동산 시장의 '양 회장'으로 자리매김 하셨습니다.


장모님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용감한 사업가셨습니다. 해운대 마린시티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때는 시행사를 연고 없이 찾아가셨습니다. 회장님을 다이렉트로 만나셨습니다. 자신감을 최대치로 탑재한 어머님은 당신께서 구상하신 상가 유치 기획안을 회장님께 직접 브리핑하셨고, 결국 시행사와 전속 상가 유치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당시 생소했던 야외 데크를 아파트 상가 앞에 설치해 상가 일대를 유럽풍 분위기로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이해관계자들은 물론, 클라이언트, 상가 이용 고객까지 만족시키는 최적의 솔루션을 만들어내셨습니다.


내 업무 성과가 불만족스럽고 일이 잘 안 풀릴 땐 그래서 ‘어머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헤아려 보곤 합니다. 본질에 집중하셨던 그 성정에 비춰보면 내 당면한 문제가 뭔지,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영점이 잡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본질적인 부스러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거나, 우선 순위를 잘못 설정했을 때가 많습니다.


저 역시 제 업의 본질에 근접해 ‘아, 이건 컨설팅의 개념이다’ 방향을 잡았고, 우선 순위를 적확히 조정해 계약 파트너에게 제 솔루션의 가치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암으로 어머님을 여읜지 8년여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장모님은 제 하늘 멘토이신 이유입니다.


사자는 먹잇감에 집중합니다. 하이에나는 그 부스러기에 천착합니다. 사자는 자신의 신체적 장점을 극대화해 사냥하고 그 영역을 개척합니다. 하이에나는 사자가 떠난 자리에 남은 뼛조각과 부스러기를 수습합니다. 어머님 수첩에 적힌 메모들은 모두 사안의 핵심만 추린 단어들입니다. 늘 단정한 자세로 담백하게 본질에 집중하셨던 그 삶의 태도를 제 스스로 늘 견지하면 좋겠습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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