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향으로 남은 추억
대학교에 와 보니 여학생들은 열이면 아홉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시골에서 아이스크림에 웨하스 올린 '프라페'는 먹어봤는데 도대체 아메리카노는 정체가 뭔지, 원두 커피와 어떤 점이 다르고 카페모카나 라떼는 무엇으로 만드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동기 남자애들 하고는 주로 컵라면 먹으며 PC방 카운터스트라이크나 플스방 위닝을 즐겨했을 뿐 어느 놈 하나 속 시원하게 온갖 커피명의 복잡미묘한 아이덴티티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해서 대학교 2학년 때 커피숍 알바를 시작했다. 커피 종류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였다. 지인 소개로 찾아간 곳은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원두 커피 전문점 '미네르바'였다.
아래층 사철탕집만 빼놓고 보면 사이폰으로 원두 커피를 내리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데이트 명소였다. 한 겨울 나무 프레임 창 밖에 눈 내리는 정경이 퍽 그림 같았다. 그래서인지 알바생들의 커뮤니티가 끈끈했고 책임지는 범위도 넓었는데 면접 날 알바 선배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뭐 드실래요?" 아기 입맛인 나는 당 보충하겠다고 달달한 커피를 부탁했다. 휘핑이 올라간 카페 모카가 나왔다. 긴장을 했는지 배가 고팠던 건지 난 벌컥벌컥 원샷해버렸다. 첫 맛은 달짝지근한 데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다. 면접을 마친 사장님은 볼 일 보러 나가셨고 나는 한 동안 자리에 앉아 미세먼지 마신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일하던 그 선배는 언뜻 내 상태를 훑어보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더 내줬다. "느끼한 게 좀 누그러질 거에요"
신기하게도 시금씁쓸한 아메리카노로 입 안을 헹구고 나니 느글느글하던 속이 좀 진정됐다. "오 이거 좋은데요?" 아메리카노는 걍 쓴 블랙커피인가 보다 했던 나는 갑자기 아메리카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 선배는 "아메리카노는 처음 마실 때는 쓰고 시기만 한데 오랜 기간 자주 마시다 보면 단맛도 살짝 나고.. 뭔가 그 특유의 맛을 점점 알게 돼요"라고 말했다. 아 그렇구나. 그래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구나.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면 그 말을 곱씹게 된다.
커피숍 알바를 하면서 커피가 크게 에스프레소 커피와 원두 커피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됐다. 에스프레소는 머신으로 착즙하면 나오는 원액이었다. 이를 그냥 마시면 에스프레소 커피다. 여기에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 우유를 부으면 라떼다. 라떼는 바닐라와 모카로 나뉘는데 바닐라 시럽을 넣고 우유 거품을 올리면 바닐라 라떼, 초코 시럽을 넣으면 모카 라떼다. 모카 라떼에 휘핑을 올리면 카페 모카가 된다. 라떼에 우유 거품만 얹으면 카푸치노.
원두 커피는 원두를 갈아서 물을 부어 부드러운 커피 원액을 직접 내려먹는 개념이었다. 컵 위에 드리퍼를 올려 필터를 편 후 곱게 간 원두 가루를 쏟고 손 주전자로 내리면 핸드 드립이다. 우리 가게는 플라스크 속 물을 가열하면 압력 때문에 물이 주둥이 위로 올라가 위쪽에 준비돼 있던 원두 가루와 섞인 걸 내려먹는 사이폰 방식. 도시 사람들이나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당연한 개념들이겠만 시골서 상경한 촌스런 남자 대학생에게 다양한 이름의 커피는 신세계 그 자체였다.
식탁에 앉아, 커피숍 알바하면서 매장에 자주 틀었던 히데오 고보리의 연주곡을 듣다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커피향처럼 피어오른다. 쌀쌀한 겨울은 따뜻한 기억을 추억하기에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