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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an 10. 2019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재즈처럼 활자를 변주하는 마법

내가 처음으로 재밌게 읽었던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였다. 당시 중학교 1학년 때라, 아주 섬세하게 과거를 거슬러 오른다면 다른 소설 한두 개쯤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력이라는 녀석은 생각 외로 믿을만한 게 못 되기에 그저 <1Q84>이겠거니, 하는 것뿐이다.


나는 수많은 하루키의 책을 읽었지만, <1Q84>는 유난히 위협적인 자태를 갖은 두꺼운 책이었다. 얼마나 두껍냐 하면, 은행 강도가 인질의 머리를 향해 책을 들고 있으면 점장도 별 수 없이 현금 다발을 건네 버릴 두께다. 어쩌다 실수로 1권을 떨어뜨려 인질들의 손에 들어가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아주 재밌고, 두껍기 때문에 감히 반격을 감행하거나 창문을 깨고 도망가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할애된다. 그러면 인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어이, 이미 그 페이지는 읽은 지 3분이나 지났는데 얼른 넘기지 그래.” “아니, 선생님. 화장실 좀 다녀왔다고 그렇게 인정 없이 넘겨버리는 겁니까?”하는 대화들이 난무하는 틈을 타 강도는 유유히 돈을 들고 도망치지 않을까. 그렇다면 조금 걱정은 되지만 말이다.

1Q84 1권

여하튼 독서라는 행위에 매료됐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작은 방구석, 그곳에서 작가의 세상을 따라 하나둘, 걸어 들어간다. 나는 여자도 되어 보고 남자도 되어 본다. 아이도 될 수 있고 할아버지도 될 수 있다. 마음껏 소설 속 인물들 사이에 틈입해버린다. 게다가 그의 소설은 중학생이었던 나에게 여러모로 미묘한 자극을 돋우었다. 상세히 풀어놓기엔 좀 그렇지만… 음… 어… 그렇다. 결단코 말을 돌리기 위함은 아닙니다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그러고 보니 왜 나는 그의 소설에 빠져들었을까? 괜스레 생각해보니 주인공들에 대한 동경이지 않았나 싶다. 그들은 대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인텔리에 점잖은 유머를 구사할 줄 안다. 아주 능숙하다. 그리고 각티슈를 뽑듯 손쉽게 이성(異性)을 유혹해 버린다(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부럽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술이든 밥이든, 뭐든 먹는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주인공은 여자에게 얘기한다(물론 이 대화는 제가 지어낸 것입니다).

“스즈키, 아주 예뻐.”

“흐응, 거짓말하지 말아요.”

“정말이야. 한 여름의 잎사귀가 붉어질 만큼.”

“당신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그리고 주인공과 붉은 잎사귀의 여인은 유유히 가게를 나온다. 나의 눈은 더욱 빠르게 활자를 훑고, 3페이지가 채 넘어가기 전, 사면이 둘러싸인 방으로 들어간 그들은……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감상하시길 추천합니다. 헤헤.


“아니 대체 넘어간 포인트가 어디야?”하고 종종 느끼다가도, 남녀관계는 논리나 이성(理性)의 범위가 아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혹은 사카구치 켄타로나 후쿠야마 마사히루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왜 갑자기 슬퍼지는 거죠). 그나저나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하루키 씨는 멋진 연애를 많이 겪은 것 같다. 바싹 자른 짧은 머리에 캐주얼한 복장, 영어 페이퍼백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스무 살의 하루키. 약속을 위해 도착한 고베항의 하늘에는 푸른빛을 밀어낸 선 붉은 고운 빛깔이 제멋대로 침범해 있다. 모든 세상이 분홍빛으로 내리 앉아있는 그때, 저기선 한 소녀가 나풀나풀 걸어온다. 어느 계절의 따듯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하늘을 핑계로 오늘은 볼이 붉어져도 괜찮은 날이다.’라고. 나는 그의 멋진 세월을 떠올리는 것이 좋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면 언제나 노래를 듣는데, 장르는 어김없이 재즈다. 아무래도 한국 음악은 가사에 심취해버리기 쉽고 팝송은 ‘아아. 분명 아는 단어였는데.’하며 쉴 새 없이 단어 사전을 펼쳐 들기 일쑤다. 그렇게 ‘제이팝은 집중이 안 된단 말이야.’ ‘클래식은 너무 길다고.’ 하다 보면 결국 재즈만이 남게 된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도 좋고 베니 굿맨(Benny Goodman)도 좋다. 물론 빌 에반스(Bill Evans)도 빼먹을 수 없다.


재즈를 들을 때면 수많은 플레이 리스트들이 템포와 관계없이 하나로 이어진 직물처럼 느껴진다. 연거푸 바뀌는 트랙리스트에 집중이 흐트러질 일도 적고, 알맞게 빨라졌다 느려지는 템포조차도 지루하지 않게 편안한 밸런스를 조율한다. 이런 이유로 노래는 알지만 제목은 모르는 곡들도 수두룩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의 기분과 유사하다. 단순히 그의 작품을 읽을 때 재즈를 많이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어느 근사한 명반을 귓가에 새기듯 술술 나에게 들어온다. 책을 펼쳐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의 세계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어느 순간 적확한 형태의 이야기는 흐릿해지고 만다. 몇몇 이미지와 잔상들만이 아스라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여러 소설들이 모두 하나의 이야기처럼 유사하면서도, 각기 다른 템포를 갖고 있다.


유난히 그의 책을 찾아드는 날이 있다. 이를테면 먼 타지로 여행을 떠날 때면 그의 책을 집어 드는 날이 잦았다. 혹은 스파게티를 끓이다가 불현듯, 아니면 하늘이 좁은 서울 중심부를 거닐 때. 그리고 무엇보다, 멋진 여성과 멋진 데이트 마친 다음날…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건 아니고요. 생각해보면 하염없이 단조로운 일상의 단면들이다. 그의 작품은, 그런 단면들의 사이사이에 배경음악처럼 깔려있다. 해서 그의 작품은 음악 같다. 근사한 재즈 음악. 나는 그렇게 그의 글을 읽는다. 방에서만 말고. 삶의 곳곳에서 읽어낸다.


가끔 유명인이나 오래 소식을 잃은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들은 지금 무얼 할까?’하고 떠올리게 된다. 이를테면 오전 10시의 한국에서 키아누 리브스를 생각하면 ‘흐음, 틀림없이 자고 있겠군.’하고 초등학교 이후로 만나지 못한 동창을 생각하면 ‘여전히 만화책을 좋아하려나.’ 추측하고 만다. 하루키 씨는 무얼 하고 있을까? 어쩌면 빌리 홀리데이의 음반을 들을 수도, 세상을 깜짝 놀래킬 새로운 소설을 작곡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든 저렇든, 저기 먼 바다 건너, 스무 살 영화학도가 자신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추호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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