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석 Jan 24. 2019

영화 읽기와 소설 감상

동명의 영화와 소설, 무얼 먼저 봐야 할까?

내게 “취미가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요즘엔 소소히 20세기 근대 미술 작품들을 모으는 거죠. 이중섭*이나 김환기**같은 화백들의 작품 말입니다.”라거나 “아무래도 복싱이죠. 여러모로 쌓인 스트레스들을 저기 저, 샌드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니까요.”처럼 그럴싸하게 대답할 만한 문구가 없다. 미술품을 살 만큼의 재정적 여유도 없다. 취미라곤, 기껏해야 달리기나 라이딩, 음악을 듣거나 영화 혹은 책을 읽는 일이 전부다(이렇게만 적으니 무척 멋이 없네요). 꼭 ‘전부’라는 전제를 두기는 뭐 하지만 편의상 그저 ‘전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책을 읽는 일과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다. 뭐, 해서 영화학도가 됐고, 글을 씁니다만. 밀접한 분야에 빠져드니 보이는 것들이 많다. 일단 영화와 소설은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종종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무대 예술도 비교 선상에 올라오긴 하지만 전자(前者)에 비해 그리 잦지는 않은 것 같다.


그곳에는 여당과 야당이 나눠지듯, 혹은 스타워즈의 팬과 스타트랙의 팬이 팽팽히 대립하듯 상반된 의견이 생겨난다. 소설의 완고한 팬들은 작품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경우가 허다하고(아니, 원작 속 영화학도 최모 씨의 연애사가 다 잘려버렸다고!), 영화 팬들의 입장에선 월등히 더딘 전개와 자신이 보았던 것과 사뭇 다른 묘사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다(아니, 영화에선 영화학도 최모 씨가 조승우였는데, 소설 속에선 그냥 안경 쓴 샌님이잖아!). 이렇게 되면 양쪽 모두 적잖이 곤란해지고 만다.


원작의 팬들이 상상 속에서 마음껏 만들던 소설 속 이미지는 영화의 시각적 표현으로 인해 훌쩍 침범당한다. 또한 영화 팬들은 어쩐 일인지, 원작 속 캐릭터가 더 이미지에 부합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등 긴가민가한 상황에 놓인다(물론 제가 조승우보다 낫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디 욕하지 말아 주세요). 올곧이 봐왔던 영화의 이야기에 균열이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 어느 하루를 건너오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제처럼, 그렇게 두 번 다시는 처음 접한 작품에서 느꼈던 감정을 보존시킬 수만은 없게 된다. 혼탁해진다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적잖이 곤란해지고 마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이렇다는 건 아니다. 그저 보고 “으음, 이 정도면 괜찮은걸?”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런 멍청한 영화감독 같으니라고, 어떻게 조승우를 쓸 생각을 한 거야?!(또한 그냥 예시입니다. 참아주세요.)”라고 외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어느 쪽도 상관없다. 당신은 어떤 타입이신지?


우선 나 같은 경우에는 웬만하면 수용하는 타입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줏대 없이 “허허. 이번 영화는 신파 투성이에 스크린 독점이지만 저는 모두 수용합니다. 다들 저에게 오세요.”하는, 마더  테레사처럼 드넓은 아량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흥미도’에 있기 때문이다. 조승우건 뭐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세상에는 다양한 관객이 있듯 다양한 감독이 있는 것뿐이니까. 고로 어떤 감독은 원작의 일부를 추출해 보다 근사한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이고, 혹은 소설 속 이야기를 그대로를 시각화시키는데 특출 난 감독도 있는 것이다. 원작에 얽매이기보다는 그저 그만의 방식으로 어떤 식으로, 어떤 영화를 만드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소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도 치킨집 아들이 치킨을 잘 먹지 않는 것과 같이 매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작품들로부터 전이되는 감정의 농도가 옅어질 때가 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리기 십상이고, 생각 또한 그와 마찬가지다.


해서 내가 종종 즐기는 방법으론, 그러니까 영화와 소설을 같이 보고 싶은 상황일 때는 무조건 영화부터 본다(혹은 원작이 있는 근사한 영화를 보면 꼭 소설을 읽는다). 2년 전쯤만 해도 ‘소설 원작인 영화는 빠짐없이 소설을 보고 본다.’라는 근원지 불명의 감상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는 코르크 부스러기만큼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감히 추측해보기론, 책을 읽으면서 그렸던 나의 상상력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본 작품으론―당장 생각나는 걸로는― 『토니 타키타니(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2004년 영화화)』, 『도쿄타워(릴리 프랭키 원작, 2007년 영화화)』, 『빅 픽쳐(더글라스 케네디 원작, 2010년 영화화)』 등이 있다.


모두 악을 써서 욕할 만큼의 졸작도 아니었고, 인생의 몇 편 만나기 힘들만한 수작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인 것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구절들을 영화에서 못 만나는 순간들은 절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교(박범신 원작, 2012년 영화화)』를 보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완벽하게 뒤바뀌고 말았다.


『은교』를 처음 접하게 된 건 소설이 아닌 영화였다. 깨나 흡족한 작품이었는데, 중고서점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을 보곤 ‘원작은 어떠려나?’하는 단순한 호기심에 구입했다. 그랬던 책이 생각보다 재밌었다. 단숨에 작품을 읽어버린 나는 선소설 후영화 감상법보다는, 선영화 후소설 감상법이 훨씬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를 감상한 후 소설을 접하게 되면, 시각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문장들로 하여금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느껴진다. 특정 배우의 모습으로 재구성된 소설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문장을 토대로 나만의 상상력을 마음껏 덧붙이는 것이다. 물론 감독은 원작의 부분 부분을 배제시켜도 으레 그렇다는 듯이 흘러가도록 설계한다. 이때 관객이 그 공백의 크기를 체감 못하게 만드는 것이 즉, 좋은 연출이다. 추후 원작을 읽음으로써 마음껏 덧대고, 메꾸는 그 공백은 관객의 보다 자유로운 특권이며, 즐거운 행위다. 하물며 선영화 후소설 감상법은 외국 영화일 때는 스물일곱 배쯤은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고 자라온 입장이라서,―아무리 글로벌 시대라지만― 성민, 주연 같은 이름보다 길버트(Gilbert)나 쿠니타로(邦太朗)라는 이름이 낯설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오래된 외국 고전이나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다면―게다가 그 책이 300페이지가 넘어가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면― 우리는 읽는 중간중간마다 ‘으음… 길버트가 의사였던가 하급 공무원이었던가…’ ‘쿠니타로는 와타나베의 친구였나 형이었나…’하는 기억력 책망의 시간이 돼버리고 만다. 먼저 영화를 감상하면 이런 리스크는 대폭 줄어든다. 위에서 일찍이 말했듯. 소설 속 인물들은 배우의 멀끔한 얼굴들로 재구성되기 때문에, 추후 책에서 길버트나 쿠니타로라는 인물을 만나게 돼도, 우리의 사고는 즉각적으로 인물의 이름과 배우의 얼굴을 연결 지을 수 있다. 이내 한층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소설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따금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어내며 키득키득 거리기도 하며.


적다 보니 말이 길어졌군요. 다 적고 보니 ‘어느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라는 서머셋 몸의 말이 떠오른다. 면도가 거의 필요 없던 중학생 때는 ‘칫, 작가들은 아무 말이나 내뱉고 독자한테 떠넘기는 식이라니까.’하고 투덜거렸는데, 이틀에 한 번씩은 면도를 하는 20대가 되자 ‘흐음, 역시 반복되는 행동에는 철학이 깃들기 마련이군. 암암.’하며 이런 글을 적고 있다. 서머셋 몸을 꿈에서라도 만나면 굉장히 머쓱해질 것 같다. 죄송. 그나저나 매일 치킨을 마주하는 치킨집 아들은 무슨 철학을 가지고 있을까. 혹은 셀 수도 없을 만큼 연애를 한 사람이라면. 흐음… 나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


* 1916∼1956.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대 서양화의 대표 화가.

** 1913 ~ 1974 한국의 서양화가.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


매거진의 이전글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