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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사이

렛뎀, 나를 살리고 관계를 살리다.

렛뎀 이론의 시댁 적용기

by 헬시기버

요즘 '렛뎀 이론(Let Them Theory)'이 뜨겁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에너지와 시간을 쏟지 말고, 그들 그대로 두라.'는 철학.

많은 이들이 이 말에 열광하며 타투를 하기도 했단다.


처음에는 너무 무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렛뎀은 단순한 '내버려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함께였다.


그때 깨달았다.

나도 이미 시댁에 '렛뎀 이론'을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댁 계모임


남편은 늦둥이로 위로 형이 둘, 누님이 한 분 있다.

명절이나 생신, 어버이날이면 늘 시댁 식구들이 모여 시간을 함께 보낸다.

몇 해 전부터는 부모님이 연로해지셔서 숙소를 잡고 여행 겸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남편이 막내다 보니 자연스레 예약과 일정 조율을 맡고,

나는 통장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경주 여행을 가게 되었다.

하지만 형제자매가 네 명이도 보니 의견이 다 달랐다.

나는 속으로 숙소와 식당을 미리 잡고 계획을 세웠으면 싶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네 사람 마음 모으기도 어려운데,

나까지 합류하면 더 진행이 어려워질 것 같았다.

때론 답답해 보이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된 데는 계기가 있었다.


모임 통장에 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내역도 노션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공유했는데

어느 날 한 분이 "돈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다."며 물어보셨다.

순간 서운했다.

모든 걸 오픈했는데, 확인도 안 하시고 그런 말을 하시다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시댁 일은 시댁 식구들이 주도하도록 두자.

나는 요청이 있을 때만 돕자.'


그게 나를 보호하는 렛뎀이었다.


남편은 의견이 없거나 엇갈리는 형제들 사이에서 애를 먹었다.

답변이 늦어 진행이 지연되기도 하고 불만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옆에서 조언을 건넸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무조건 내버려 둔 건 아니었다.

필요할 때 돕고, 아닌 때는 한 발 물러섰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렛뎀'이었다.


그렇게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시댁 모임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 맘에 들지 않아도 '렛뎀'.

그 흐름에 몸을 맡기자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자, 마음의 공간이 넓어졌다.

이전보다 수용력이 커지고, 내 생각도 더 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시어머님과의 관계


나는 자칭 타칭 모범생이다.

크게 혼난 기억도 없다.

그런데 시댁에만 가면 꼭 한 번씩은 혼이 났다.


하루는 밥을 고봉으로 푸지 않았다고,

하루는 수세미를 잘 못 골랐다고.


나도 경상도 사람이지만, 대구분인 시어머님의 말투는 여전히 낯설었다.


그래서 시댁에 갈 때마다 긴장이 됐다.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혼날까.'


이번 추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덕션 화구를 잘 못 선택했다고 혼이 났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렛뎀 이론이 작동했다.


'어머님은 원래 이런 말투를 쓰시는 분이지.'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했다.

상을 차리고, 음식 준비를 돕고,

그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훨씬 편했다.

억울해하거나 속상한 감정에 매달리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니, 관계가 부드러워졌다.


연휴가 끝나갈 무렵,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아, 이게 렛뎀이론이었구나.'


나를 지키면서도 관계를 살리는 법.

그 단순하지만 어려운 마음의 기술을

나는 시댁에서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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