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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마담 Sep 02. 2019

5호선 민망역

[마음을 담은 편지] #5

<댄싱9 갈라쇼>를 보러 가는 날입니다. 방송으로 팬이 된 김설진씨가 실제 춤추는 걸 볼 수 있어 아침부터 설렜죠. 한강진역에 있는 블루스퀘어에서 할 줄 알았는데 5호선 아차산역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하더군요. 회사가 있는 DMC역 공항철도를 타고 중간에 갈아타면 약 45분 걸립니다.


칼퇴근하는데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다른 팀 직원이 나오더군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까지 의미 없지만 농담으로 화기애애했습니다. 공항철도역까지 걸어 다니던 이 친구, 그 날은 피곤하다며 저를 따라 지하철역을 순행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탔습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봤어요. 동일 라인을 같이 가는 건 아닐까 궁금했습니다. 어린이 대공원 근처에 살아 5호선 답십리 역에서 내리더군요. 그 역은 제가 내릴 아차산역 직전이었습니다. 다크서클이 쭈욱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40분 이상 같이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소소하지만 난감했어요.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일 경우 주로 하는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나 신변잡기, 안부와 같은 가벼운 소재들이죠. 속 깊은 얘기나 퇴근 후 업무 얘기는 뜬금없어 갑작스러워 보입니다. 한편 아는 분을 옆에 두고 내 할 일만 하기도 신경쓰여 불편했어요.


한 시간여 되는 시간을 그리 보내긴 아까웠어요. ‘차장님은 어디까지 가세요?' 물어보는데 순간 멈칫, '아~ 저는 약속 때문에 2호선 갈아타야 돼요' 대충 얼버무렸죠. 환승 예정이던 공덕역 전 홍대입구역에서 먼저 내렸어요. 피한 듯해서 미안했지만 30분 이상 여유가 생겨 편했습니다.


다시 2호선 왕십리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 타야 했어요. 문득 '여기서 또 만나면 어떡하지?' 싶었으나 '설마~’ 일축했습니다. 더 빨랐을 테니 먼저 지나갔을 거라 믿었어요. 계단 밑에서 5호선 지하철 한 대가 도착한 소리가 들렸어요. 빠른 걸음으로 재촉하여 뛰어 탔습니다.


'돌아 왔지만 늦지는 않겠다' 싶은 안도감에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어요. 아까 헤어졌던 그 친구가 바로 제 앞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어?' 실제 짧았겠지만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같이 가는 게 싫어 일부러 돌아 왔구나' 제 마음이 걸린 듯 찔렸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어요. 궁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 나왔습니다. "(놀란듯 반가운척하며)와~ 선임님~ 약속 장소를 잘못 알았어요. 알고 보니 아치산역이더라고요?'


고맙게도 믿어 주는 듯 (혹은 '척') 했습니다. 두 정거장을 더 가며 우린 신기한 일에 놀라며 웃었습니다. '이야~ 2호선으로 오는 게 더 빠르네요?'라며 너스레 떨었지만 속으론 일부러 피한 게 못내 부끄러웠어요. 이제 자신이 먼저 내린다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비슷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하철 타러 가는 데 낯익지만 친분없는 직원이 앞에 가면 천천히 걸어 마주칠 일을 피해요. 반대로 재촉하여 먼저 갈 때도 있습니다. 행여 만나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라며 서먹한 침묵을 깨려고 노력하죠.


신경이 쓰이니 반가운 한편 피곤했습니다. 나 때문에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유쾌하지 못해도 지루하지 않게 해야 된다는 의무가 들어요. 배려라기 보다 오지랖 넓은 책임감에 스스로 무거워집니다. 다시 만나 신기했지만 당시 제 마음이 보였다면 얼마나 웃겼을까요?


댄싱9 커튼콜 사진. 공연은 잘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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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왕마담 드림

http://wangmad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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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민망해요. 본문에 쓰지는 않았지만, '그 먼길을 일부러 돌아온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 나한테 왜이래?' 대상없는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까지 들었어요. 요맘때인 2014년 9월 22일에 보낸 편지입니다. 덥다고 비명을 질렀는데,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엔 쌀쌀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계절이 깊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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