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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헤두안나 Apr 15. 2024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23화 올갱이 국 -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이번 선거는 온 가족이 모두 투표를 했습니다. 투표용지에 나란히 올라와 있는 이름을 보면서 정말 감회가 새롭더군요. 큰 아이도 내려오면서 주민등록상 합가를 했고, 2월생인 작은 아이도 선거권 연령이 18세로 변경되면서 생애 처음으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투표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올갱이 국밥집을 찾았습니다. 이 메뉴는 만두에 이은 우리 식구 최애 음식입니다. 올갱이는 다슬기의 충청도식 표현입니다. 올갱이 국은 된장을 풀어 진한 맛을 곁들인 충청도식 향토음식입니다. 시골에서 자랐지만 결혼 전에는 지천에 널려 있던 다슬기를 국으로 끓여 먹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정성 가득한 그 맛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시아버님이 한가득 잡아 오신 다슬기에 시어머니가 된장을 듬뿍 넣고 푹 삶아 내십니다. 구수한 된장냄새와 다슬기 향이 합쳐지면서 입맛을 자극합니다. 다슬기를 하나씩 빼먹으면서 행복해하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분가 이후 지인에게 부탁해 팩으로 만들어 파는 다슬기를 구입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맛을 재현해 보았습니다. 꼭 맞춤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긴 했는지, 남편도 아이들도 맛있게 먹습니다. 이제 시험 때나 가족들이 힘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올갱이 국을 끓여 먹이곤 합니다. 큰 아이 수능 도시락에도 함께 했고, 올해 작은 아이 도시락에도 올갱이 국을 끓여주려 합니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을 먹으면서 긴장을 조금이라도 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남편과 산책길에 찾아낸 올갱이 국밥집은 집 근처 대학병원 앞에 있습니다. 손님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맛을 아는 단골 위주로 운영되는 식당입니다. 우리 부부도 전날 술 한 잔 먹고 해장이 필요하거나 가끔 그 맛이 생각나면 찾곤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경상도식이어서 그동안 먹던 맛과 달라 조금 걱정했는데, 무색할 만큼 맛있게 먹어줍니다. 또 다른 매력이 있다면서……. 이제 부부끼리만 오던 장소가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핫플레이스가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기분 좋은 경험입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막 들어서자 작은 아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에 있는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긴장이 됩니다. 수화기 너머로 살짝 흥분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시는 연세 많으신 아주머니가 아이에게 용돈을 주셨다는 겁니다. 


며칠 전 아주머니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조금 이른 급식을 끝내고 교실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급식실 아주머니가 찾는다면서 빨리 가보라고 했다군요. 아마도 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를 챙겨 주시려나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갔는데, 흰 봉투를 건네셨다는 겁니다. 


배식 시간에  사랑한다고 말해 주시는 아주머니에게, 아이는  상냥함을 장착한 특유의 미소로 인사를 한 모양입니다. 항상 웃어 주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챙겨주고 싶었다고, 맛있는 것 사 먹고 힘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면서 주셨다고 합니다. 봉투 안에는 현금 오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절대 받을 수 없다고 당황해하는 아이에게 꼭 받아야 한다면서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고 합니다.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집에 와서 상의하자고 말하고 일단 끊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바쁜 엄마로 인해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길을 가다가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볼 때면 다정하고 친절한 모드로 전환합니다. 미소가 예쁜 아이는 주변사람들에게 칭찬이나 예쁨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전적인 보상(?)을 받는 경우는 친가, 외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 외에는 없는 일이어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현재 읽고 있는 데일 카네기의『인간관계론』의 내용이 생각납니다. 카네기는 좋은 인상을 주는 간단한 방법으로 ‘미소’를 제안합니다. 그는 수천 명의 비즈니스맨들에게 일주일 동안 매일 매시간 누군가에게 미소를 짓고, 수업에 와서 그 결과를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메리카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는 윌리엄 B. 스타인하트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들어주면 일이 훨씬 쉽게 풀리고 미소가 돈을 매일같이 많은 돈을 벌어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교수에 의하면 행동이 감정을 따르는 것 같지만 사실 행동과 감정은 같이 간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행동을 조절하면 직접적인 통제가 불가능한 감정도 간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가는 최고의 길은 즐거운 자세를 가지고 이미 즐거운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출처: 데일 카네기 『인간관계론』) 



고민이 깊어지더군요. 어떡해야 할까? 담임선생님과 상의하기도 그렇고, 돌려드리는 것도, 그냥 받는 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고민하다 일단 아주머니의 마음을 받고 수능 끝나고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자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조금 당황했지만 카네기의 말처럼 미소가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네요. 


그렇게 오만 원이 든 봉투는 아이의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되었습니다. 그 봉투를 보면서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것에 대한 기쁨을 알게 되었겠지요. 자존감이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좋은 경험과 깨달음을 선물해 주신 아주머니에게 감사합니다.  


오늘은 남편의 생일입니다. 미역국과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이것저것 상을 차렸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늦잠을 자는 아이들을 두고 오붓하게 생일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이들과는 저녁에 백화점 뒷골목에 있는 치맥집에 가서 치킨과 맥주로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습니다. 딸들과 잘 어울리는 아빠! 스스로 몸을 낮추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남편이 참 고맙습니다.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세 모녀 옆에서 든든하게 버텨주는 남편이 있기에 세 모녀의 고군분투가 계속될 수 있다고 말이지요.  


식구들의 생일이면 우리 가족은 함께 네 컷 사진을 찍습니다. 오늘도 딸들의 코칭을 받아 사진을 찍어 냉장고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사진을 보면서 지난 시간을 추억합니다. 불콰해진 얼굴로 7080 노래를 들으면서 감상에 빠져 있는 남편입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생일을 홀로 즐기도록 남겨두고 저는 조용히 한주를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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