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친정엄마 - 부모기
전공 수업을 하고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조금 멍해지기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건너려는데, 차 한 대가 돌진해 와 바로 앞에서 끽소리를 내며 멈췄습니다. 정말 한 발만 내디뎠더라면 사고를 당할 뻔 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횡단보로로 건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머뭇거리는 사이 그 차는 인사도 없이 휭 가버렸습니다.
소형차였습니다. 운전자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지나고 생각하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내에서는 시속 30km 정도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요. 너무 놀랐습니다. 집에 와서도 한 동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아이들 저녁을 피자로 대신하고 말았습니다.
큰 아이는 조금 전략을 바꾸어 보기로 했습니다. 전공을 살린 특채가 있어 그 준비를 해보려고 합니다. 회계 관리 자격증이 있으면 특채 모집에 지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아이는 관련된 책을 사서 본격적으로 5월 자격시험 대비를 시작했습니다. 조금 다른 길이기는 하지만, 2차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 또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자격을 갖추어 놓고 원서 낼 즈음에서 공채든 특채든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헤매고 있네요. 사실 책을 내기 위해 준비하던 작업들이 방향성을 잃었습니다. 좀 더 대중적인 책을 출판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면서 현재 쓰고 있는 글이 너무 전문적이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의욕이 상실되었고 글도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바람도 쐴 겸 일요일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코엑스에서 열리는 현대 미술대전에 다녀왔습니다. 딸 결혼을 앞두고 그림 선물을 하려는 지인이 초청해서 미술사 전공 교수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잘 성장한 지인의 딸을 보면서 마치 내 딸인 것처럼 흐뭇하더군요. 유명 방송사 기자로 매일 TV에서 얼굴을 봐온 터라 낯익은 얼굴입니다. 엄마 친구들의 싸인 요청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입니다. 방송에서 보는 것보다 더 예쁘고 순수한 모습에 홀딱 반했습니다. 우리 딸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처음 본 전시회 겸 판매 현장이었습니다. 정말 많고 다양한 그림 종류에 압도되어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전시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각 갤러리 별로 전시와 판매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미술 쪽은 큰 관심이 없던 분야였지만, 관련 포럼과 세미나를 통해 조금씩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작가는 저런 창의적인 생각과 표현을 해야 하는구나를 배우고 왔습니다. 같은 표현이 하나도 없는 다양한 화가들의 작품 세계와 그들의 창의성에 놀라움을 경험한 시간이었습니다. 초대해 준 지인에게도 함께 간 전공 교수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어서 너무 고맙습니다. 머지않아 저 그림 중 하나가 우리 집에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 화가가 반드시 훌륭한 작가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지요.
내려오는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지칠 줄 모릅니다. 같은 길을 가면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셋이 모이면 세미나도, 술 한 잔 하면서 나누는 마음의 이야기도 모두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때로는 가족 이외에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 딸만 낳은 세 여자가 모여 딸들 이야기, 그리고 친정엄마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청첩장도 받았습니다. 지난번 중학교 동창에 이은 두 번째 청첩장이네요. 자꾸 기분이 묘해집니다. 지인들의 자녀가 하나 둘 결혼을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이제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덧 이렇게 나이를 먹고 아이들의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이 과정을 넘고 나면 각자 원하는 사랑을 찾아가겠지요.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네요. 식구들 모두 각자 스케줄이 있어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고3 이가 달려와 안깁니다. 아직 애기 같은데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이상해집니다. 큰 아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진정한 양육은 사랑이 아니라 독립이라 했으니, 잘 안전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최선이겠지요.
발달심리학자 갈린스키(Galinsky)는 ‘부모기’를 하나의 성장․발달 과정으로 보고, 생명이 잉태되는 시기부터 자녀의 성장단계와 맞물려 부모의 성장을 여섯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시기는 임신기간으로 ‘이미지 형성기’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양육기'로 출산 후 생후 2년까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2~5세의 아이를 양육하는 ‘권위 형성기’입니다. 네 번째 단계는 ‘설명하며 가르치는 시기’로 5세 이후부터 초등학교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단계는 10대 시기로 ‘상호의존기’라고 합니다. 이때 부모는 권위보다 합리적인 형태로 바뀌어야 하며, 자녀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확한 한계와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자아정체감 형성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고, 보호자가 아닌 독립적인 인격체로 상호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는 바로 ‘떠나보내는 시기’입니다. 자녀가 성장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독립하는 시기에 부모의 역할은 변화합니다. 자녀는 그동안 부모와 경험했던 기억을 통해 자신의 가정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자녀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며 살게 됩니다. 이때 일부 부모 중에는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반응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맞추어 가야 합니다. (출처 : 문은식외 3인, 대인관계 심리학)
내년이면 팔순이신 친정엄마는 보청기 수리를 위해 대전에 오셨습니다. 막내 동생 집에 머물고 계십니다. 이비인후과가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 올케에게 부탁해 식사하고 가시도록 했습니다. 좋아하시는 열무냉면을 준비했습니다. 시장하셔서 그런지 맛있게 드셨습니다. 풋마늘무침도 상큼하다 하시면서 음식솜씨가 늘었다며 칭찬도 해주셨습니다.
임시로 받은 보청기가 귀에 맞지 않는다며, 불편해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이래저래 바쁘고 무뚝뚝한 딸보다 막내며느리를 더 편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딸 집 보다 아들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오늘도 밥을 드신 후 서둘러 가자고 올케를 재촉합니다. 조금 어색한 친정엄마와 딸이 되어 버렸네요. 더 약해지고 어려진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잔상으로 남아 마음이 심난합니다. 편한 자식에게 기대고픈 마음은 이해하지만, 올케나 막내 동생에게 항상 미안합니다.
친정 엄마를 뵈면서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나의 엄마만큼 늙어서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하는 몸을 간신히 부여잡은 채 살고 있을 미래의 나에게 부탁합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따뜻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일을 잘 해내는 그런 멋있는 엄마로 남아 달라고 말이지요. 내가 친정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잘 떠나왔듯이 우리 아이들이 떠나는 날, 잘 보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할 듯합니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라도 자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