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 유동성 지능
“엄마, 초기상담에서 이루어져야 할 내용이 뭐예요?”
“음~~~~~~~, 아, 모르겠어.”
“뭐야 방금 물어봤잖아? 공부한 거 맞아요?”
임상심리사 실기 시험을 준비하는 엄마를 딸들이 도와주겠다고 문제를 냅니다. 나름대로 공부를 했고 상식으로도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아이들은 정답을 말하지 못하는 엄마를 두고 놀리기 시작합니다. 그 옆에서 남편이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 탓을 하면서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스스로에게 화가 납니다. 분명 공부한 내용이고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2주 동안 이 시험에만 매달리기 위해 다른 일들을 되도록 미루었습니다. 세미나 원고와 발제도, 독서모임도 양해를 구했고, 블로그와 브런치 글도 쓰지 않았습니다. 학교 수업도 중간고사와 맞물려 수업 준비를 공들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소진된 체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상 시간을 6시로 조정하고 아침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집중력 저하가 체력 때문이라 판단했고, 마지막 1주일 컨디션 관리를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50대 갱년기 체력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고 집중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필답형 주관식 유형인 실기 시험은 최대한 정확한 답안을 작성해야 합니다. 임상 현장에 있지 않은 점이 실기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론 위주로 공부하고 외우면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서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습니다.
글자와 내용들이 고스란히 튕겨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커다란 콘크리트 벽이 머리를 감싸고 있고, 결코 그 어떤 글자와 지식을 들여보내지 않겠노라 작정한 것 같았습니다. 분명 방금 본 내용인데, 다시 정리하려고 하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글자를 박박 지우는 지우개가 머릿속에 있는 느낌입니다.
필기시험에 이어서 바로 도전했어야 했을까? 학기 중에 도전하는 것이 잘못이었을까? 급기야 이 시험에 도전하는 일 자체가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포기되지 않는 마음에 자책만 더욱 커집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알게 모르게 식구들을 향해 있었나 봅니다. 괜히 집안 분위기만 어색해지고 말았습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엄마 눈치만 보고 있네요.
문득 3학년 ‘자기표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떠오릅니다.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20대 젊은 학생들 사이 연세가 지긋하신 두 명의 학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창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학부로 입학한 분들이었습니다. ‘자기표현 글쓰기’ 수업의 커리큘럼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삶을 잘 설계해 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 안에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할 수 있는 효능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서사가 매우 중요한 수업 자료로 활용됩니다.
두 분은 맨 앞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발표도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인생을 이만큼 살아온 나이 든 학생들의 서사는 수업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이대로라면 아마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필시험입니다. 기말고사는 발표 영상으로 평가하기에 중간고사 문제를 조금 어렵고 까다롭게 출제했습니다. 두 분 역시 시험공부를 하면서 의욕과는 다른 어려움을 경험하셨겠지요. 공감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시험에서는 암기능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지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웩슬러는 지능(Intelligence)이란 개인이 합목적적으로 행동하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는 종합적 ․ 전체적인 능력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그리고 심리학자 카텔은 지능을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과 결정성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유동성 지능은 유전적 ․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으로 뇌와 중추신경계의 성숙에 비례하여 발달합니다. 주로 기계적 암기, 지각능력, 일반적 추론능력 등이 해당됩니다. 이 지능은 청년기 이후부터 서서히 퇴보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결정성 지능은 환경이나 경험, 문화적 영향에 의해 발달되는 지능으로 후천적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언어이해능력, 문제해결능력, 상식, 논리적 추리력 등과 같이 나이를 먹으면서도 계속 발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론적으로 유동성 지능의 퇴화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알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아직도 하고 있는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하면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 암기 영역은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립니다.
작은 아이는 인생 통틀어 공부가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3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시험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험 과목수가 적어 부담이 덜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국영수 주요 세 과목만 등급이 나오기 때문에 내신 등급을 뒤집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큰 아이는 8월 시험까지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 문제를 풀면서 자꾸 의구심이 든다고 합니다. 이제 익숙한 문제들을 풀면서 정답률이 높아지는 것이 스스로 알아서 풀기 때문인지, 아니면 문제를 많이 풀어서 그냥 단순히 외운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다면서 공부 방법을 조금 바꾸어 보겠다고 합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옆에서 그냥 지켜봐 주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좋아하는 딸기주스를 갈아주면서 말이지요.
이제 잠시 미루어 놓았던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어떤 일을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제가 하고 싶은 자기표현 행위입니다. 글 쓰는 일이 우선순위가 밀리지 않는 업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