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삿포로 여행 - 기꺼이 겪어주기
6월을 마무리했습니다. 2024년 상반기 동안 참 열심히도 달려왔더군요. 강의, 글쓰기에 주력하면서 나름대로 성과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소소한 일들로 좌절하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선방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이 쌓여서 올해 좋은 성과로 마무리되었으면 합니다.
큰 아이는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경기 남부청, 서울청, 그리고 인천청을 놓고 고심했습니다. 채용인원이 남경의 10/1 수준이다 보니, 결코 쉽지 않습니다. 3월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인원을 놓고 고민이 깊어집니다. 서울 채용 인원이 줄었고 그 인원이 지방으로 다소 분산되었습니다. 조금 수월한 곳을 선택하기 위한 눈치싸움이다 보니, 경쟁률이 어떻게 나올지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일단 고민하는 시간과 계속 신경 쓰는 것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한 아이는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과감하게 경기 남부청에 지원을 했습니다. 부디 이 선택이 아이 인생에 꽃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 시기, 가장 중요한 3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봅니다. 그래서 오늘 생일인데 불구하고 미역국을 먹지 못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속설이라는 것을 알지만, 글쎄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아이에게 미역국을 먹이고 싶지 않은 것이 엄마 마음인가 봅니다. 생일은 내년에도 돌아올 테니까요. 작은 아이 시험이 끝나는 날, 우리 가족은 제 생일 파티를 겸해 대전의 핫한 장소에서 외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등급이 올라 부디 기분 좋은 외출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12월에 삿포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6년 전 큰 아이가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에 괌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후로 코로나와 입시, 취업 준비와 맞물려 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대로 작년에 딸아이들만 오사카를 다녀온 것이 전부입니다.
괌 여행 당시 브이로그 형식으로 만든 영상을 보면서 우리 가족은 그때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추억여행을 갑니다. 예비 6학년이었던 작은 아이가 만든 영상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출발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3박 4일의 짧은 일정을 담은 영상은 BGM과 함께 우리 가족의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아이는 영상을 만들 계획을 합니다. 글로 쓰는 기록도 좋지만, 영상 기록은 잔영이 오래 남는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에, 적극 동의했습니다. 아마도 그때보다 훨씬 퀄리티가 높아지겠지요.
남편이 아이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삿포로 사진을 출력해서 코팅까지 입혀왔습니다. 다섯 장의 풍경을 잘 볼 수 있도록 거실 책장에 세워 놓았습니다. 한 겨울의 풍경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저도 아이들도 이 사진을 보면서 확실한 동기부여를 합니다.
장맛비가 내립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은 운동을 가지 못했습니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한 시간 가량 집 근처 공원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것이 전부이기는 하지만, 루틴을 반복하지 못하니 몸이 찌뿌듯합니다. 한동안 저에게 운동을 강권하던 남편이 기특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한 듯합니다. 저는 이 시간이 참 좋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약 한 시간가량 유튜브 채널을 고정적으로 듣는 것도 힐링이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순간,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는 시간과 바로 이렇게 운동하는 시간입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글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튼 이 순간이 참 행복합니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예술가적 자질을 갖고 있는 지인들을 보면 올빼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밤 10시만 넘으면 집중력도 떨어지고 무언가 에너지 넘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 이것이 한계인가? 그런 자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철저한 아침형, 아니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을 안 순간, 밤 10시가 넘어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 조금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일을 합니다.
물론 이런 사이클이 딸들하고 맞지 않아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거실에 만들어 놓은 학습 공간에서 밤새워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딸들에게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엄마가 한심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본인들이 자고 있는 새벽 시간에 일어나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는 이해해 줍니다. 되도록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방학만이라도 사이클을 바꾸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아이들이 한창 공부하고 있는 밤에는 병든 닭이 되어 꾸벅꾸벅 졸다가 기면증 환자처럼 쓰러져 잠이 듭니다.
오늘도 제 기상시간은 새벽 4시 30분, 5시에 알람을 맞추어 놓았으나 자동으로 눈이 떠집니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어느새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머리가 조금 복잡합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는 뇌과학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기까지 처음에는 당황하고 불편하고 그러다 이 일이 편안해지기 시작하겠지요.
새로운 논문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저에게 항상 이런 불편함을 안겨 줍니다. 이제 글을 쓰는 일은 저에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서도 초고를 쓰는 순간은 항상 불편합니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무조건 일단 써놓고 보지요. 그러나 논문은 그렇게 쓸 수가 없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썼다가는 진짜 이것도 저것도 아닌 궤변을 늘어놓게 되니까요.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낯선 것을 할 때 심리적 ․ 생리적으로 ‘투쟁-도피 반응 fight-or-fight response을 보입니다. 맞서 싸우고 극복하거나 아니면 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최적화합니다. 이때 자율 신경계의 교감신경계가 근육을 긴장시키고 필요한 에너지를 총동원합니다. 그래서 일단 두렵고, 당황하고 불편하면서 스트레스로 작용합니다.
낯선 것에서 느끼는 본능적 부정감은 인지적 오류에 의한 것입니다. 대부분 이러한 불편함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회피의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결코 회피나 억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낯선 것에 대해 두려움의 부정적 정서를 느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기꺼이 겪어주기’를 해야 합니다.
이번 방학, 계획하고 있는 새로운 도전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기꺼이 겪어주기’를 하면서 고군분투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시간마저 참 고맙고 행복한 일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다 공부를 해야만 하는 직업을 선택했고, 이제는 그 공부가 조금씩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제 뇌가 이제 이것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되었나 봅니다.
아마도 평생 이런 삶을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재미없는 삶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학계에 획을 그을 이론을 만들어 내거나 대단한 연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만족이지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제가 행복해서 하는 일이고 저의 행복으로 주변 사람들, 특히 아이들과 남편이 행복할 수 있다면 더없이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 세 모녀의 고군분투, 오늘도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