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끝

-자아정체성-

by 엔헤두안나

장고의 시간이었습니다. 2024년 9월을 마지막으로 멈추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를 갈무리하려 합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기 위한 목적은 책 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공부하고 관심 있었던 분야를 모아 책으로 엮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인 실행을 위해 밀리로드에 연재를 시작했고 원고를 다듬어 출판사 10곳에 투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거절이었습니다. 효능감은 바닥을 치고 말았습니다.


당시 큰딸아이는 2차 경찰공채 시험에서 다시 고배를 마신 상황이었습니다. 고3 딸아이는 수시지원을 앞두고 있었고, 낮은 내신등급과 불안한 모의고사 성적은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번아웃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글쓰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 모녀의 고군분투 생존기’ 브런치도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 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작은 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학교와 학과는 아니지만, H대 논술전형에 합격하고 무사히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이과였기 때문에 논술전형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과내신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고 학종 역시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입시전문 담임선생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시 3개를 논술전형으로 썼습니다. 다행히 그중 한 곳에 합격을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두 아이를 논술로 대학에 보낸 엄마가 되었네요.


지금은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깊어진 모습입니다. 그 곁에서 엄마인 저는 다시 기다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직 스무 살,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시간의 정점이라는 것을 본인은 알까요? 서두르지 말고 조금은 여유롭게, 고민하면서 그렇게 첫여름방학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큰 아이는 올 3월 시험에서도 아까운 점수로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잠시 숨 고르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길어진 수험기간에 아이도 저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알아보던 아이는 경찰청년인턴에 지원을 했습니다. 청년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인턴조차 ‘금턴’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습니다. 또 하나의 실패경험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다행히 합격을 하고 첫 월급을 탔습니다. 현재는 근무와 공채시험 준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적으로도 지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으로 인한 신선한 자극이 적절한 동기부여가 되는 듯합니다. 선배 경찰관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다시 꿈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독한 번아웃으로 인해 한 학기 정도 쉬어볼까도 고민했지만, 재임용 서류를 내고 다시 강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글을 쓰지 못한 채 1학기를 마무리하고 방학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학기는 글쓰기 교수에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그 누구도 아닌 AI라는 사실을 확인한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첨삭하면서 과연 학생들이 쓴 것인지, AI가 쓴 것인지 명확하게 판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아니 가르칠 필요는 있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면서 방향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처음 AI가 등장할 때만 해도 이렇게 무서운 속도로 변화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학에서는 교수자들에게 학생들이 AI를 사용해서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미국대학이 교수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AI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것이었지요. 2년여의 시간이 지금 규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글쓰기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이번 방학은 이에 대한 방안을 고민하는 것에 집중할 것 같습니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 속에서 다시 나를 찾아갑니다. 이 나이에 다시 ‘정체성’을 찾는 숙제에 직면하고 말았네요. 와중에 철학자 탁석산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저에게 작은 위로가 됩니다.



“정체성이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은 시대에 따라 만들어지고 삭제된다. 정체성은 개인의 일생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이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삶의 시기에 따라 그 시기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와 양상들이 다를 것이다.”



‘세 모녀의 고군분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렇겠지요.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해 가는 아이들, 그 곁에서 저도 이 지독한 번아웃과 갱년기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힘을 내봅니다. 아마도 다음 주제는 ‘갱년기 부부의 고군분투 생존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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