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bina Sep 10. 2020

사물이 말을 걸어오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며.

지금은 사라진 공간이 있다.

문지방: 출입문 밑의, 두 문설주 사이에 마루보다 조금 높게 가로로 댄 나무.       

지금이야, 인테리어 리모델링을 할 때 제일 먼저 없애는 공간이기도 하고, 문지방은 이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들 사이에 문지방이 있듯 시간들 사이에도 무소속의 시간, 시간의 분류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잉여의 시간이 있다.-<<아침의 피아노>>-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중에서

죽음을 앞두고 써 내려간 김진영 철학자의 일기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남겨진 시간이 없어서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조차 없다는 소리 없는 절규를 읽어낼 때, 그가 말하는 무소속의 시간을 유추해 보았다.


어제와 내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무런 목적도 없는 계획된 쓰임도 없는 시간, 오로지 자체만을 위해서 남겨진 공백의 시간, 김진영 철학자는 또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날짜를 기다리며 남겨진 생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나 보다. 그저 주어진 시간이 감사했으리라. 어제, 지금 그리고 내일 그 어딘가에 속한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분류법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서 [시간] 자체로 빛나는 그 무소속의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으리라.


낡은 주택을 개조해서 1층은 카페로 2층은 상담실로 만들 때, 참 많은 계획을 세웠는데 그 계획안에 돈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 그 무모함이 에니어그램 7번 뿌리를 가진 나라는 사람이다. 그 무모함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어느 날은 독촉 전화로, 어느 날은 모아 놓은 돈이 없는 막막함으로..

일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에니어그램 7번 상담사인 나는, 행복한 시각화를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 따위는 망각하고 달린다. 철저하게 주어진 시간을 제대로 보내고 싶어서 쪼개고 쪼개서 [잘 살았구나] 안도할 때까지 달린다.


문지방이 말을 걸어왔다.

생각의 꼬리가 길어지자, 낡은 주택 거실과 방 사이 문지방이 말을 걸어왔다.

넘어져서야 알았다.

-아, 이곳에 문지방이 있었지. 리모델링할 때 문지방도 없애야 했는데...

넘어져서야 알았다.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은 문지방은 원래 그 자리에서 무소속의 공간으로 버티고 70년 주택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생각의 꼬리가 길어지고 가슴 한편 쓸어내리는 현실 가장의 한숨이 깊어지자, 문지방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조심해라.


그녀는 친정의 집안일을 떠맡아했다. 가정교사, 간호부, 주방장, 비서, 하녀의 역할을 두루 했지만 어머니의 말 없는 역정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말>> 장 폴 사르트르

가난과 장애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때,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나에게 쉰다는 단어는 논다는 단어로 변질되어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쉬어 보질 못했다.


상담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삶을 본 타인의 잣대는 [여유롭다]지만,

제대로 쉬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한가하다]였다.

일정을 만들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올라올 때,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나올 때 70년 된 낡은 주택에서 떼어내지 못한 문지방이 말을 걸어왔다.

나, 여기 있다.

공간과 공간 사이에서 소속이 없는 그 낡은 문지방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소속이 없는 내가 소속이 있고, 존재감이 없던 과거쯤 눈물도 안 나오는 현실이 있다.

불쑥불쑥 찾아와 평안한 감정을 헤집어 놓고 가는 그림자로 생각이 많아진 날, 문지방에 걸터앉아 말해본다.

-야, 존재감 확실하네!

낡은 문지방을 어루만져 본다. 마치 나의 마음을 쓰다듬듯...

생각의 꼬리가 생각의 정리로 넘어갔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책을 읽는 행위, 그림을 그리는 행위, 전화로 상담을 해 주는 행위, 맛있는 커피에 감사를 표하는 행위... 모두가 일정이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릅답습니다.-<<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

평안해진 나의 마음에 조용히 가라앉는 앙드레 고르의 러브레터,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책이 되어 나의 이목을 사로잡았는데, 지금 그 책의 서문이 나를 설레게 한다. 

두 줄의 문장이 주는 감동에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나무 벤치에 걸터앉아 늙은 남편에게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늙은 나를 상상해 본다.

나의 여든두 살은 그렇게 [누구]와 함께였다.

그림을 그려야겠다.

나이 들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얀 머리는 염색을 하자.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옷이 낡았다는 건 아니잖아...

나이 여든두 살에도 꽃다발을 받을 수 있겠지.

그림이 말을 걸어온다.

행복하자


책을 다시 펼쳐본다.

1947년 도린과 만나 49년에 결혼했으며 아내가 불치병에 걸리자 공적인 활동을 접고 20여 년간 간호했다. 2007년 9월 22일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D에게 보낸 편지... 

다시 가슴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내게는 안타까운 사연이 아니라 부러운 사연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생각의 꼬리가 길어진다.


문지방이 말을 걸어온다.

조심해...
작가의 이전글 동갑의 심리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