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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bina Sep 19. 202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썸, 그 짜릿함에 관하여.

활자중독에 편집증까지 있는 나는 계속 거슬렸다.

-선생님 현민이와 나는 맞지 않아요. 헤어지려고요.

-아, 사귄 지?

-100일인가? 그런데요, 걔는 틀렸어요...

-뭐가요?

-예전 남자 친구들과 틀려요.

-아, 뭐가 다른가요?

-네. 그냥 느낌이 틀려요.

이런, 유도했는데도 다르다를 틀리다로 자꾸 말하고 있다. 거슬린다.


그녀는  말할 때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카페로 들어오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나와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선생님, 저는요. 전화번호가 따이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요.

토익을 공부하는 그룹, 그 모임에서 자기만 쳐다본다는 그 남자가 드디어 전화번호를 물어올 때 그녀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그가 몰랐으면 했다고.

-공부하러 갔으니 꾸미지도 않았는데... 다가왔어요.

-기분이 어땠나요?

-운명 같았어요. 휴대폰으로 번호를 찍어주면서 저는 알았어요. 현민이랑 사귈 거라는 것을.

-마음에 들었나 봐요? 쉽게 번호를 준 걸 보면.

-글쎄요...


트렌디라고 부르는 단어에 사랑의 방식이, 사랑하는 대상이, 사랑하는 기간이 들어간다면 씁쓸하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https://youtu.be/p_1ypvwxiSw

가수 소유가 공기반, 소리반 목소리로 [썸]을 부를 때, 불혹이 넘은 나는 의미도 모른 채 아이들처럼 흥얼거리며 그렇게 그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는 지천명이 넘어서 그 [썸]을 주제로 상담해주고 있다니.


깊은 사랑, 깊은 이해, 그래서 결혼. 이 공식은 이제 없는 것일까?

청춘들이 말하는 사랑이 가볍다고 치부할 수는 없으나, 나름의 심리학적 [썸]의 이해도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청춘들이 물어오는 이별의 아픔을 치유해주기 위해 나는 [썸]을 연구했다.


가슴 떨리는 그 순간이 주는 쾌감 때문에 연애가 곧 결혼이라는 공식을 깬 건지,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육아의 부담이 커져서 결혼보다는 연애만 하는 건지, 사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 심오하게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에니어그램 7번 상담사니,  [썸] 그 단어가 주는 중독에 관하여, 권태기인 듯 아닌 듯 익숙해지는 연인 사이가 아닌, 밥 먹다가, 샤워하다가, 자다가도 배시시 웃어버리는 [이제 막 사귀는 사이]에 대하여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썸의 개념, 즉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라는 미묘한 관계에 대한 개념 자체는 아주 예전부터 존재했다. 밴드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지금의 '썸'과 유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무려 20년도 더 전인 1992년에 발표된 노래다. 다만 그 당시의 이런 관계는 지금만큼 긍정적이고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달달함보다는 헤어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지금의 썸은 이미 존재하던 개념이 한 단어로 정리된 데다 나아가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인식도 널리 퍼진 상태가 된 것이다.
썸은 본래 썸싱(something)의 약어로 흔히 썸남, 썸녀, 썸 타다 등으로 표현되는 인터넷 신조어이다..
예전에도 '썸씽이 있었다' 등의 고전적인 표현이 있었지만 의미는 보통 '남들에게 티 내지 않고 사귀다', 혹은 '남들 모르게 육체적 관계가 있었다.', '남들 몰래 했다' 등의 뜻이었다면 지금은 좀 소프트한 뜻으로 단어의 의미가 변형되었다.
지금의 썸과 과거의 썸씽은 모두 something, 즉 불분명한 어떤 것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지만 지금의 '썸'은 그 관계를 가진 남녀 사이의 불분명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춘 단어라고 할 수 있고, 과거의 썸씽은 그 관계의 남녀가 아닌 타인, 주변인이 볼 때의 불분명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다르다. 단어의 중심이 '타인'에서 '자신'으로 넘어온 것이다.

맞다.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남녀 사이에 불분명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춘 썸은 '타인'이 아닌 [자신]으로 집중되는 단어가 맞다.

잘 모르던 남자가 관심을 가져주는 그 눈빛과, 테이블 아래에서 우연히 스친 다리, 펜을 건네주다가 자연스럽게 만지는 손의 촉감에서 여자는 직감한다.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할 거 같아.

여자의 시선이 따뜻해지니 그녀의 현민이는 여자의 말을 빌리면 더 친절해졌고, 더 자주 부딪혔고, 더 잘 생겨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낄 때 바로 번호를 묻던가요?

-아뇨,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썸이 좀 있었어요.

-기분이 어땠나요?

-나쁘지 않았어요

-답답하지 않았나요? 기다리는 것이...

-아뇨, 어차피 나를 좋아하는데요. 뭐. 즐겼어요


자기를 좋아한다는 확신은 그녀에게 도파민을 방출하게 했다.

행복한 기분을 만들어주는 도파민은 그녀를 외향성으로 만들었다고.

공부하러 갈 때 편한 옷이 아닌, 원피스를 입고 갔고, 별 거 아닌 대화에도 까르르까르르 웃었다고 했다.

그때마다 현민이는 자기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고, 자기 때문에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지금 나는 에니어그램 3번, 타인의 시선을 잘 느낀다는 그 3번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조잘대는 말들을 옮기고 있다.

그리고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는 것이다. [뚜벅뚜벅]

그리고 현민이가 건넨 휴대폰에 자기 번호를 찍어주면서 속으로 말했다고.

심장아 나대지 마

출처:뀨잉 넷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현민이와 헤어지려고 준비하는 그녀의 얼굴이 흐려졌다.

-선생님, 왜 남자들은 여자를 소유하면 친절하지 않고, 밥 먹는 속도도 맞춰주지 않고, 카톡 답도 늦게 줄까요?

-느낌 아닐까요? 바쁜 이유도 있을 수 있고...

-그리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잇몸도 보기 싫고, 여름 반바지에 정리 안 된 털도 보기 싫어요.

-어허, 썸 탈 때는 잇몸이 다 안 보였나요? 그때는 다리 털이 잠깐 숨어 있었나요?

-아.. 그때는 다 좋아 보였다니까요! 몰라요 현민이는 다른 남자랑 틀려요. 재미없어졌어요.

저런, 거슬린다.

[틀려요 가 아니라 달라요]라고 말하고 싶다.

-예전에는... 물론, 100일 전이지만, 현민이가 지나갈 때마다 좋은 냄새가 났고, 몸매도 좋아 보였어요.

-서로 연인이 될 때는 기분이 어땠나요?

-처음 일주일은 미치도록 행복했어요. 그리고 밤마다 대화하다 잠들었어요. 목소리가 성시경 같았어요.

-지금은요?

-모르겠어요... 단점만 보여요. 현민이는 다른 남자랑 틀려요. 내가 알던 다른 남자들은..

그녀의 현민이가 도마 위에서 난도질을 당하고 있을 때, 나는 직감했다.

'곧 헤어지겠네'


'사랑은 둘이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생텍쥐베리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잠깐의 설렘에 흥분하는 인스턴트 사랑의 시대를 예상이나 했을까.
유독 눈에 띄는 푸른 수염의 남자처럼 현실의 남자는 무언가 걸리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로 작정한 이 여자는 이 거슬리는 구석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열 가지 부분 중 한 가지일 뿐이라고 애써 치부하고 만다. 좋은 부분이 아홉 가지이니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넘어가자고 작정해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확증 편향’이라고 한다. 믿기로 작정하면 믿는 트랙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쭉 달려가는 게 인간의 빈약한 이성인 걸 어쩌겠나.  <<빨간 모자가 하고 싶은 말>>「푸른 수염의 딸로 자란다는 것」 중에서

그를 보면 가슴이 뛰고 그의 다리 털이 안 보이고 그의 목소리가 성시경이 되는 '확증편향'의 시기가 [썸] 타는 시기라고 한다면, 연인으로 발전하고 단점이 보이는 시기도 확증편향이 아닐까?

씁쓸하다.

나도 너에게는 수없이 많은 다른 여우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中  

길들여지는 시간이 없고, 단점이 장점으로 바뀔 수 있는 기다림의 시간이 없는 [썸]으로 끝나는, 그래서 카카오톡 프로필에  [연애 중]보다 [썸 타는 중]에 반응을 보이는 타인의 시선에 우쭐대며 미소 짓는 청춘들의 마음이, 가끔은 씁쓸하다.


살아보니 그렇더라.

남자의 향수보다 남자의 살갗의 냄새가 좋고

상담해보니 그렇더라.

말이 없던 남자가 해맑게 웃을 때 보이는 덧니가 귀여워 보이는 시기가 오기도 하는.


-우리 책을 읽어볼까요?

-무슨 책이요?

-어린 왕자 어때요?

-초등학생도 읽다가 포기했다는 그 책이요?

허허...

-선생님, 그것보다도 요, 남자의 심리가 궁금해요. 왜 남자들은 틀려질까요?

허허... 이제는 말해야겠다.

-그니까 썸 탈 때는 맞고 연인이 되면 틀려진다는 거지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거지요?

-네?

그니까요, 현민이는 다른 남자랑 틀린게 아니라 다르다는 거지요?
네??

'그니까요... 이제는 책과  썸을 타보자고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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