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둔 그림자를 비추는 한줄기 빛.
다락방, 창문은 작았다.
다락방 바닥에 고개를 붙여야 보이는 작은 창문 밖으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고개를 이리저리 젖혀야 보이는 그 나무는, 가끔 바람을 타고 거슬러 창 안에 있는 내게로 왔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반쯤 내밀고 목을 틀어야 풍경이 보이는 그곳, 그곳은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나누는 대화가 너무 어려웠다.
장애인으로 만들어진 그는 읽었던 책들을 왜 다락에 두고 갔을까?
장애인으로 만들어진 나는 왜 그가 두고 간 책에서 희망을 보았을까?
다락방, 창문을 열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 맞은편 나무에게 마음을 전했다.
"데미안에게 나뭇잎 책갈피를 선물하고 싶어"
그 어린아이는 고마웠을 거야.
힘이 없는 다리에 전지전능한 힘이 불쑥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경사가 급한 다락방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가도 지치지 않고, 육체적 교감을 나누는 부모 옆에서 자지 않아도 되는 그 작은 다락방이 고마웠을 거야.
그리고... 알을 깨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깨라고 속삭이는 데미안이 고마웠을 거야.
폐가가 기울고 있었다.
18년 방치해 놓고 지붕이 가라앉은 그곳으로 스며든 빗물이 나의 공간을 침범하는데 폐가의 주인은 배 째라고 했다. 그에게 폐가는 생각하기 싫은 애물단지라고 했는데, 나에게 폐가는 나의 하얀 공간을 더 빛나게 해주는 어두운 조형물이었다... 그 폐가가 철거되고 있다.
둔탁한 망치가 폐가를 건드릴 때마다 하얗게 보톡스 맞은 나의 건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면 나는 뛰어내려 갈 수 있을까?
백수 아버지가 던지는 물건을 오빠들은 잘도 피했는데, 나는 피할 수 없었다.
화가 나면 던지는 사람이 있다.
던지고 무너지는 물건에 나는 피할 수 없었다.
폐가가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끄고...
이불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하얀 속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오늘만 지나면 돼..."
조용하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다. 고개를 비틀고 비스듬히 창가를 바라보았다.
한 줄기 빛이 보인다.
어두운 암막커튼 사이 한줄기 빛 그 사이로 차창 너머 경찰청 별장이 보였다.
비스듬한 건물이, 거꾸로 다가오는 앙상한 나무들이 손짓한다. 그곳은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어릴 적, 바늘구멍 사진기로 풍경을 보면 세상은 거꾸로였다.
어릴 적, 다락방 창문으로 보는 세상은 거꾸로였다.
캄캄한 방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에 외부의 풍경이 거꾸로 보이는 카메라 옵스큐라는 제대로 어두워야 제대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어두운 다락방에는 고개를 반쯤 빼야 보이는 풍경이 있다. 그곳에서 데미안을 닮은 장애인을 만났다.
폐가가 버티고 있던 나의 공간은 어두웠다. 그곳에서 싱클레어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둡고 힘든 과거, 어둡고 힘든 사람들...
장애인이 두고 간 책에서 희망을 배운 나는 싱클레어를 닮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상담사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카메라 옵스큐라를 깨고 있다.
제대로 삶을 이해하고 제대로 풍경을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나는 그들에게 빛이고 싶다.
한줄기 빛,
다락방 어두운 공간에 빛이 되어 찾아온 책처럼
기울어가는 폐가 옆에서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나의 공간처럼
칠흑 같은 어둠에서 또렷이 빛나는 한 줄기 희망이고 싶다.
빛은 멀리 있어도 또렷했다. 빛이 사라지면 어둠은 티 없이 깨끗하게 왔다. 암흑보다 짙은 칠흑은 심우주처럼 보였다.-서 철원<<최후의 만찬>.
돌아보니, 다락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고, 살아보니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이 더 빛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깊은 우주에서 심연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약용(정약용)은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 안을 옷과 이불로 촘촘히 막았다. 겹겹이 눌린 어둠의 요철이 방 안에 괴어 들었다(...) 어둠 속에 약용은 손톱만 한 구멍을 뚫고 직선으로 뻗어오는 외줄기 섬광을 주시했다.(..)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 구멍에 끼우자 빛은 한순간 둥근 쟁만 만큼이나 넓어졌다. 투명한 쟁반 안으로 세상은 실려왔다. 이 원리는 서역 페르시아를 지나 까마득한 비단길을 따라 북경을 거쳐 전해왔다. 서역에서는 빛을 가둔 어둠의 땅을 '카메라 옵스큐라'라고 했다.-서 철원<<최후의 만찬>>
카메라 옵스큐라는 15세기 유럽, 화가들의 필수 도구였다. 사실적인 그림이 크게 유행하여 사랑을 받고, 이로 인해 사실적인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서 스케치를 신속 정확하게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카메라 옵스큐라가 조선시대에 존재했다고 한다. 이름은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 "검은 방"과 "유리 눈"을 의미한다. 즉, "검은 방"을 의미하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한자어인 셈이다.
정약용은 칠실파려안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정조 15년(신해辛亥, 1791년),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과 권상연은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를 지냈다는 이유로 완산 풍남문 앞에서 처형당한다. 두 선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였다. 정조는 추조적발 과정에서 윤지충의 집에서 그림 한 점을 압수됐음을 보고 받는다. 열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 그림. 죽기 전 윤지충이 말하길 예수와 그 열두 제자의 식사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그림,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본.
도화서 화원들은 그림을 불살라 없애라고 하지만 임금은 그림에서 조선과 연관된 원대한 꿈과 수수께끼 같은 비밀을 직감한다. 그리고 서학과 유교가 맞서는 난세의 어려움을 풀어가고자 도화서 별제 김홍도를 불러들여 그림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맡긴다.
『최후의 만찬』은 유교와 서학의 충돌 속에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정조의 심리뿐만이 아니라 순교 소식을 듣고 신앙이 흔들리는 정약용의 심리를 마치 그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그려낸다. 정약용은 “곡기를 끊고 기도에 묻혀도 글 속에 잠재된 천주의 신념은 허기”로 왔으며 “ 순교의 그루터기에서 윤지충은 살아남은 자들의 신앙을 더 어렵게” 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오랜 통치 수단이었던 유교의 전통과 충돌해가며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 신해년 이후 20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념과 정치, 신념과 양심이 격돌하고 있다. 과연 신념을 따르고 순교로써 영원한 삶을 택하는 게 옳은 선택인가. 아니면 정약용처럼 신념을 버리더라도 편입하여 살아남는 게 옳은 선택인가. 편입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이 소설은 미래에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지 고뇌하게 하는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오직 빛과 어둠만으로 찰나의 모습을 종이에 새겨 넣었다. 구멍밖에 사람을 세우면 방안에 설치된 종이에 거꾸로 상이 맺혀 들었다. 종이에 새겨 든 그림을 바라보며 약용은 숨이 차오르는 것을 알았다. 그림의 농도와 밀도만으로 두근거리는 것을 알았다.(...)
칠실파려안 안쪽으로 윤지충의 저승길에 들려오던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을 가로질러 종이를 횡단하는 빛이 곱고 따스했다.(...)
카메라 옵스큐라.
약용은 천천히 힘주어 뱉었다. 용어 속에 빛과 어둠은 차분히 가라앉아있었다. 그 빛은 선이 될지 그 어둠은 악이 될지 알 수 없으나...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온통 까맣다고 표현했던 그녀는 하얀 도화지에 도회적인 여자를 그렸다. 눈동자의 색은 파란색이고, 입술은 주황색이어야 하는, 남과 다르게 그려지는 그녀의 그림은 빛이 될까? 여전히 어둠일까? 남과 다른 생각을 하고, 남과 다르게 시간을 낭비했다고 자책하는 그녀는 남과 다르게 생각을 했고 남과 다르게 속도가 느릴 뿐이다. 어두웠던 과거를 토해내자 슬픔이 서린 그녀의 목소리는 <<최후의 만찬>> 소설에 등장하는 순교한 여령(女伶)의 여식 도향이가 연주하는 가야금 울림처럼 맑고 가끔은 정약용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그녀가 뿜어대는 빛에 나는 감동했다. 그녀는 카메라 옵스큐라였다. 어둠이 가라앉고 빛이 되어 앉아있는... 거꾸로 봐야 제대로 보이는... 그녀는 칠실파려안이었다.
고개를 젖히고 바라보는 나무와 건물이 거꾸로 나의 눈에 들어온다.
거꾸로 보인다고 풍경이 아닐까.
나무와 새와 구름과 별을 똑바로 바라본다.
한꺼번에 들어오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결국은 풍경인데, 누구에게는 빛이고 어둠이라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서 장영실을 발견한 서 철원 작가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똑바로 봤을까? 고개를 젖히고 봤을까?
서 철원 작가에게 세상은 빛일까? 어둠일까?
옆 집 폐가가 조용하다.
썩은 내 진동하던 폐가는 온데간데없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용기만 있으면 종양처럼 자리 잡은 과거는 빛이 된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걸까...
김홍도는 (……)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까닭 모를 두려움이 밀려왔고, 시간이 멎은 듯 눈앞이 캄캄하고 어두웠다. 얼어붙은 느낌은 무엇이 될지, 몸서리치는 것도 잠시 삶과 죽음으로 분할된 양자의 선택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멎은 듯 눈앞이 캄캄하고 무서워 벌벌 떨던 어두운 곳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조용하다.
살면서 죽음으로 갈 것인지, 죽음으로써 삶으로 나갈 것인지는 내가 그리는 그림에 있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 걸까...
남과 달라서 죽을 듯 괴롭다고 했던 그녀는 제대로 죽었던 경험이 빛이 되어 제대로 살고 있다.
거꾸로 보였던 풍경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용기, 그 용기를 가진 그녀는 세상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했다.
나는 거꾸로 살아간다고 고백했던 그녀에게 한줄기 빛이 되었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빛이 되고 싶다.
무엇이 그리 두려운가.
제대로 어두워야 제대로 빛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