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2.

거짓도 사랑할 수 있는가

by Sabina

[일러두기:본 소설은 실화에 근거를 둔 허구입니다. 창작 소유권은 황정미에게 있습니다]


갑자기 쌀쌀해진 공기에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내가 보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침대 옆에 대충 벗어둔 팬티에 종아리보다는 두꺼운 허벅지가 들어가고 적당하게 탄력이 붙은 엉덩이를 지나 치골까지 팬티를 끌어당기고야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깼어?

뒤틀어진 린넨 침구 위에는 새벽까지 켜둔 향초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나는 끌어당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오늘은 트랜치 코트를 입어야겠어...'


-커피 내려줄게.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없다. 그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커피를 내려주는 날은 뜨겁게 사랑한 밤을 지샌 아침이다.


손은 말없는 얼굴을 대신해서 드리퍼 안에 여과지 커피 필터를 접어 놓고 가장 비싼 드립 주전자 호소구치로 가늘고 고르게 물줄기를 따르고 있었다.

-커피는 로스팅의 온도, 시간, 속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 시나몬 로스팅까지는 신맛이 강해.


딱 좋은 느낌이라는 게 있을까.

더 안고 싶고, 더 느끼고 싶고, 사실 나는 대화가 필요했다.

-풀 시티 로스트에 이르면 옅은 신맛, 단맛이 감도는 풍부한 향미를 느낄 수 있어.

'그래...딱 거기까지...'


린넨 침구가 뒤틀어지는 것을 느끼면 신경이 쓰인다고 말하고 싶었다. 정신적 교감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고.

-프렌치 로스트 이후에는 신맛은 없어지고 쓴맛을 주로 느끼게 돼. 그 이후부터는 탄맛이 나지.

아, 나는 물었다.

-좋아?

-응?

-커피가 좋으냐고?


빽빽한 도서가 가득한 열람실 바닥에 한번이라도 형광 펜을 떨어뜨려야 했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웃어주기만 해도 되는 남자는 그렇게 약간은 허술해야 했다.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면 생각을 포기하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표정이 없다면 뻔한 답을 거부하고 무모해지고 감정을 분리한다고 들었다.

그런 남자일까.

손가락 마디에 잘 붙어있는 연두색 형광 펜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텁텁한 마음 따위 신경쓰지 않는그 남자의 입술이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데, 그는 책을 사랑하고 글을 사랑하는지 밑줄을 긋고 노트에 필기를 하며 계속 입술을 움직였다. 가끔 식은 커피 잔을 힐끔거릴 때도 연두색 형광 펜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순간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 남자가 지나치게 생각이 많은 사람이어도, 감정을 분리해도 나에게 말을 걸어주기만 해도 좋겠다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생각의 시선으로 보는 거겠지. 눈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도 상상하고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은 내 눈 앞에서 기억의 비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거워졌다.

그때, 그의 손가락 마디에서 형광 펜이 떨어졌다. 손목의 리듬이 깨져버린 그는 중얼거리던 입술을 멈추고 맞은편 나를 쳐다 보았다.


그 무렵 내가 사랑하던 말들이 있었는데. 봄 비, 불 빛, 맨드라미, 그리고 안녕...

-안녕하세요...?

어쩌면 이쯤에서 나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반가워요...


그때 그 도서관에는 맨드라미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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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카페 힐링스페이스에 연재했던 소설입니다. 퇴고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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