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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Dec 11. 2023

11_12월의 경주, 겨울의 경주산책


겨울.

하얀 눈이 내리는 곳은 겨울이 기다려지는 계절이다. 하얀 눈이 만드는 아름다운 풍경은 겨울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경주는 눈이 잘 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금방 녹거나 쌓이더라도 이틀 이상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 매년 겨울이 오기 전 하얀 설경으로 변한 경주의 고분 풍경과 첨성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은 희망을 가지지만, 아직 운이 닿지 않아 사진으로 기록하지 못했다. 


올해 11월 18일. 11월 경주에 눈이 내렸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녹았다.

하얀 설경이 없는 겨울의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꽤나 허전하다. 풍성했던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앙상하게 남은 가지와 초록의 잔디가 누렇게 옷을 갈아입은 풍경은 ‘공’을 느끼게 한다. 비움이 있어야 채움이 있고 가득 찼을 때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은 삶의 이치인 만큼 겨울이 있어야 다시 봄을 맞을 수 있고 여름과 가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일 년 내내 봄이나 여름, 가을이라면 그것도 좀 지루하지 않을까.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산다는 것은 변화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고 그 말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생각을 한다. 더운 곳에만 사는 사람들은 추울 때 어떤 느낌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반대로 추운 곳에만 사는 사람들도 더운 지역에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더위를 참아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추위와 더위를 모두 겪으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상황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경험이 있으니까.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이 많이 쌓여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장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서론이 길었다. 경주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예년보다 겨울이 늦게 찾아와서 한편으론 반갑기도,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자고로 여름은 여름다워야,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겨울이 여름 같다면 그건 어딘가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니까. 12월에도 기온이 20도 가까이 오르고 장마철 못지않은 비가 내린다는 건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기후변화가 우리의 일상에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아니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경주의 겨울은 공허하다. 추운 날씨에 밖을 다니기도 망설여지지만 그렇다고 실내만 찾아다니기엔 겨울이 아쉽다. 겨울의 경주산책은 어디가 좋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겨울이어서 더 낭만 있는 곳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1년 내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나무가 있다. 봄을 대표하는 나무라면 벚꽃이 피는 벚나무가 있을 테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회화나무나 팽나무, 느티나무가 있다. 가을 하면 노란 은행나무나 붉게 물드는 단풍나무가 있다. 그럼 겨울에는? 대부분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겨울이지만 봄의 모습, 여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는 나무가 있다. 바로 소나무다. 

괘릉의 소나무

소나무의 솔은 으뜸을 의미하는데 풀이하면 으뜸 나무이니 예부터 우리에게 소나무가 어떤 존재였는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흔한 수종이지만 이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워 러시아 같은 경우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경주에는 소나무가 많다. 아니, 경주뿐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산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가 소나무다. 국가인 애국가에도 등장하고 고전 문학의 소재로 소나무만큼 자주 사용된 나무도 드물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을 비롯한 조선시대 건축물의 목재도 많은 부분 소나무가 쓰였다. 그만큼 우리에게 소나무는 익숙하고 친숙한 존재다. 

흔히 소나무 하면 사계절 푸른 잎과 함께 곧게 뻗은 모습을 떠올린다. 대나무와 함께 꼿꼿하고 강직함을 상징하는 대표주자가 바로 소나무니까. 하지만 경주의 소나무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곧게 뻗어 올라간 소나무가 아닌 굽고 굽어 볼품없이 생긴 그런 소나무다.

경주와 인근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런 소나무를 경주 안강형 소나무라 지칭한다. 안강은 경주 북쪽의 안강읍을 의미하는데 이곳 안강읍 흥덕왕릉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의 소나무가 자란다. 


흥덕왕릉의 소나무 숲

이 명칭을 붙인 사람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산림학자 우에키 호미키였다. 그는 1928년 조선의 소나무를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소나무들을 지역적 특성에 따라 6가지로 구분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안강형 소나무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안강의 소나무가 가장 볼품없고 못생긴 형태여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도 소나무의 자태는 곧게 자라는 소나무를 가치있게 여겼으니, 경주에서 보이는 소나무의 가치는 낮게 평가되었다. 

어떤 이유로 경주에서 자라는 소나무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소나무가 곧게 자라기 어려운 경주 지역의 자연조건과 (낮은 강수량, 큰 기온 편차) 곧게 자라는 우량 소나무는 모두 베어서 목재로 활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열등한 유전을 가진 소나무만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한다.


괘릉과 소나무 숲. 경주의 신라왕릉은 대부분 소나무가 주변을 두르고 있다.


독특하게도 소나무는 천연 제초제를 분비하는 특성이 있어 소나무 숲에는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무덤 주위에는 소나무를 심지 않는다. 무덤에 심은 잔디가 죽기 때문이다. 

소나무는 과거 황제의 나무였다. 중국 황제의 무덤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심어졌고 이는 고려와 조선의 능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무덤 주위에 조성된 소나무 숲을 도래솔이라 한다. 지금 신라의 왕릉으로 비정되는 곳에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아 보이지만, 신라시대부터 소나무 숲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록 목재로서의 가치는 낮지만 경주의 소나무만이 가진 독특한 형태는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소나무 숲에서의 경험도 특별하다. 자연이 만드는 공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일찍이 삼릉의 소나무 숲은 사진가들에게는 명소가 되었다. 짙게 안개가 끼는 날 아침이면 경주의 소나무 숲이 주는 특별함에 많은 사진가들이 풍경을 담기 위해 찾는다. 


사진 명소로 알려진 삼릉 솔숲


소나무는 한반도에 살아왔던 조상들의 역사, 시간 그 자체다. 왕이 지나는 길에 가지를 들어 올려 관직을 받은 정이품송을 비롯해 바닷가에는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는 곳들이 많다. 그만큼 소나무가 가진 끈끈한 생명력과 강인한 이미지는 오랜 시간 이 땅의 사람들에게 고귀한 존재로 여겨져 왔다. 

오릉의 소나무 숲


경애왕릉의 솔숲


겨울이라서, 겨울이니까.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주의 소나무 숲. 

특히 겨울엔 벌레들이 동면에 들어가 다른 계절보다 숲을 거닐기가 수월하다. 

이 겨울, 경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나무 숲을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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