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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14. 2024

12_ 2024 푸른 용을 만나러 문무대왕릉으로

동해의 섬


겨울엔 경주의 바다를 전하고 싶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겨울과 닮아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해변을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 그리고 죽어서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바다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어느 한 영웅의 삶까지. 

  경주의 바다는 낯설다. 나 역시도 처음 경주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경주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경주시내에서 동쪽 해안가로 가기 위해서는 높은 산을 넘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오래전부터 이곳의 생활과 문화권은 경주보다는 위로는 포항, 아래로는 울산과 더 가까웠다. 실제로 과거에는 경주가 아닌 포항과 울산 권역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구역 개편으로 경주로 편입되었지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시간의 흔적은 여전히 경주이지만, 경주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오늘의 목적지 봉길해변으로 가기 위해 150번 시내버스에 오른다.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양남면 종점까지 가는 150번 버스는 150번과 150-1번 두 노선으로 나뉜다. 차이점은 보문단지의 세부 구간을 경유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150-1번이 호텔단지를 경유해 봉길해변까지 가는데 150번보다 약 10~15분 정도 더 소요되는 편이다. 


낯설지만 꽤 괜찮은 버스여행


  버스로 봉길해변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차량을 이용한다면 40분 정도 걸린다. 시간적인 측면에서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지만 경주 여행에서는 버스로 다니는 것을 추천한다. 연인이든,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여행이든. 평소 차량으로 다니던 편안함을 잠시 내려놓고 버스를 이용하는 불편함을 즐겨보는 거다. 처음에는 버스 시간에 맞춰 일정을 짜야하고 들고 다닐 수 있는 짐도 제한되겠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마음이 가벼워진다. 버스 타야 하니까 놓고 가야 해! 차량이 있으면 자연스레 차에 얽매이게 된다. 누군가는 운전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운전을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 간의 공백이 생겨버린다. 

  하지만 버스를 이용할 경우 운전에 대한 부담이 적기에 조금 더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창 밖의 풍경도 함께, 여유롭게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오롯이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벼운 이야기든, 혹은 조금 진지한 이야기든.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 여행은 그것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경주로 여행을 왔다면, 경주에서 만큼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행 시간 안에 무엇을 많이 하려고 하기보다 조금 더 깊이 있게, 천천히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한다. 경주에는 우리나라의 다른 곳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경주만의 매력. 바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150번 버스를 타면 경주 시내를 지나 보문단지를 지난다. 1970년대 한센인들의 집단거주지였던 이곳을 관광단지로 조성했는데 처음에는 외국인만 이용이 가능했다가, 이후 내국인도 이용할 수 있게 바뀌었다. 이곳에 외국계 호텔이 들어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봄에는 벚꽃길로, 여름엔 보문 호수의 낭만적인 여름밤 공연으로 가을엔 단풍이 매력적인 보문호수 옆으로 버스는 달린다. 언니가 꾼 꿈을 산 덕분에 왕후의 자리에도 올랐고 삼국을 통일한 아들을 낳은 문희의 대담함을 생각한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이었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남존여비의 사상이 일상화되었기에 그녀의 당돌함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이전 고려, 거슬러 신라를 생각해 보면 우리 역사상 유일하게 여왕이 즉위했던 시대상황을 생각해 봐도 오랜 시간 남성과 여성은 층위가 나누어지거나 갈등의 대상이 아닌 공존 상대이자 협력의 대상이었다.

  보문단지에는 2개의 황룡사탑 복원물이 있다. 하나는 황룡원이고 하나는 엑스포공원의 기념관. 경주에서 황룡사탑이란,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 황룡사탑이란. 언젠가 다시 황룡사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라 확신하지만 겨울에 경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을 꼽으라면 황룡사지를 고르고 싶다.    


겨울의 황룡사지는 비어 있음이 주는 채움을 만끽할 수 있다.


  보문단지를 지나면 굽이굽이 산골짜기를 지난다. 이곳의 고개 이름은 추령. 오랜 시간 경주에 살아온 어떤 분은 경주에서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곳 추령의 단풍을 이야기하곤 했다. 추령의 단풍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는 11월 초순. 오후 3시 무렵 능선을 넘어가는 햇살을 받은 추령의 단풍은 입이 떡 벌어지는, 가을절경 그 자체다. 

  지금은 추령터널과 토함산 터널이 뚫려 동쪽 바다를 만나기 쉬워졌지만 그 옛날에는 이 길을 어떻게 넘어갔을까, 아직 남아있는 5일장 문화를 따라가다 보면 옛 시절을 그려볼 수 있다. 문무대왕면의 옛 이름인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리에는 매월 5일과 10일 5일장이 열린다. 남쪽 양남면의 중심지 하서리에 있는 양남시장에는 4일, 9일, 북쪽 감포읍 감포리의 감포시장은 3, 8일에 장이 선다. (참고로 경주 중심지의 중앙시장 장날은 2일, 7일이다) 장날을 돌며 장사를 하던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이곳 추령에 녹아있지 않을까.

   추령재를 지나면 주변의 풍경과는 이질적인 현대식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한전과 함께 공기업 선호 1순위라는 그곳.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건물이다. 역사도시, 우리나라에서 과거의 시간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 경주지만 동시에 현대과학의 산물인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원전도시가 바로 경주다. 잘 부각되지는 않지만 원전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과 관련해서 경주는 여전히 이슈화 중인 도시 중 하나다. 과거의 산물, 문화재 보호에 열을 올리면서도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될 방사성폐기물을 보관하는 저장소가 경주에 있다는 사실이 꽤나 낯설게 다가온다. 

  경주를 대표하는 사찰이라고 하면 불국사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못지않은 고찰이 있으니 바로 기림사다. 150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기림사, 골굴사 입구 정류장을 지나게 되는데 템플스테이나 사찰 여행에 관심이 있다면 이곳 역시도 추천한다. 골굴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마애불이 있고 기림사에는 독특한 불상이 온화한 미소로 방문객을 반긴다. 


기림사에 간다면 대적광전의 꽃창살을 꼭 보자. 묘하게 예쁘니까.


  문무대왕면의 소재지인 어일리. 경주 동해안의 북쪽인 감포와 남쪽인 양남면으로 가는 버스는 여기서 갈린다. 감포를 오가는 버스인 100번과 양남을 오가는 150번은 시내에서 보문단지를 거쳐 어일리까지는 같은 노선을 공유하다 이곳에서 100번은 북쪽으로, 150번은 남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곳곳에 세월이 묻어 있는 건물들이 창밖으로 보인다. 감포와 양남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인 만큼 중간 기착지로서 과거엔 활기가 넘쳤을 텐데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없다.

  양남면 나아리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선 이후 문무대왕면과 양남면에는 원전과 관련된 시설들이 많이 들어섰다. 직원들의 사택을 비롯해 관측시설, 전시관, 복지시설은 물론 식당이나 편의점 같은 상업시설도 다수 들어섰다. 조용했던 시골마을이 원전 건설로 하나의 산업단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산등성이로는 송전탑이 빼곡히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문화재보호를 위해 경주 시내권으로는 송전탑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남쪽 외동읍과 북쪽 안강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송전탑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가 어디서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나오는지. 버스로 다니며 보게 되는 창밖 풍경들에 안온한 우리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음을 생각한다.


동쪽에서 생산된 전기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감은사지 입구를 지나면 목적지인 봉길해변에 곧 도착이다. 버스로 이동시 감은사지를 먼저 지나기에 이곳을 먼저 둘러보아도 좋지만, 이야기 순으로 보기에는 문무대왕릉을 추천한다. 감은사지는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기 때문. 

  그렇게 1시간을 달려 도착한 봉길해변. 문무대왕릉 덕분에 유명해진 곳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해변의 풍경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앉아서 쉴 만한 벤치도 하나 없고 수상하게 보이는 방생고기 팝니다 문구가 적힌 가게가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에서 터가 가장 센, 기운이 좋은 곳을 꼽으라면 풍수가 들은 1번으로 계룡산을 이야기한다고. 그런데 그 계룡산 못지않게 터가 센 곳이 바로 이곳 문무대왕릉이라고 한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타났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삼국을 통일한 왕이라는 우리 역사에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인물인 만큼, 문무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신과 동등했을 것이다. 

  문무대왕릉 주변으로는 지나온 감은사지를 비롯해 아들인 신문왕이 세웠다는 이견대의 터가 함께 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이견정이라는 정자를 복원해 두었다. 경주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문화재로 지정된 정자다. 부산에서부터 고성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기 여행을 할 수 있는 해파랑길 경주 구간이기도 하기에 종종 걷기 여행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잠든 곳

 

 문화재, 관광지이지만 이곳 봉길해변과 문무대왕릉을 설명하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계속 이어져오는 공간이랄까. 누군가는 무섭다고도 하고 섬뜩하다고도 하지만 원래 삶과 죽음은 항상 붙어 있는 것이 아니던가. 문무대왕릉은 문무왕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삶에 대한 소망을 기원한다. 원하는 일이 잘 되도록, 아픈 사람이 낫도록,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멀리 이곳까지 와서 그에게 소망한다. 


공존

  바다의 용이 된 그에게 제를 지내고 고수레를 끝내면 기다렸다는 듯 새들이 달려든다. 동해안에 이토록 갈매기가 많은 곳은 처음. 사람들이 빌었던 소망의 끝은 갈매기들의 배로 간다. 봉길해변의 갈매기는 크고 통통하다. 굳이 먹이를 찾아 나서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먹이가 나타나니까. 사람을 그다지 피하지도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도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이곳에서만큼은 사람과 새, 그리고 저기 바다의 용이자 신이 되어버린 문무왕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어떤 삶은 마지막을 고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힌다. 반면 어떤 삶은 그와 함께 생을 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도 여전히 기억되고 이어진다. 꼭 기억되는 삶을 살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구라는 별에 나타나 나름의 발자국을 걷다 간다면, 방해보다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 한 생명으로 기억되고 싶다. 


참, 문무대왕릉은 일출 명소이니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용의 기운, 푸른 용의 기운을 받아보자!


동해에서 쉽게 보기 힘든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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