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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Jan 27. 2024

운명의 강 북천따라

경주길 3-8코스 알천제방수개기와 헌덕왕릉

경주의 알천. 지금은 북천이라고 불리는 이 강은 경주에 사람이 살고 역사가 시작된 이후 여러 차례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은 덕동호에서 발원해 형산강으로 이어지는 이 강은 서에서 동으로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그리고 관광지 경주와 주거단지 경주를 나누는 그런 강이기도 하다. 

숲머리마을에서 돌다리를 건너는 이곳이 바로 북천이다


북천 주변으로는 분황사와 황룡사지, 진평왕릉등이 있고 보문단지까지 이어진다. 경주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길에 만나는 작은 하천이 바로 북천. 경주시민들에겐 형산강과 더불어 휴식공간이자 산책공간이다. 


지금은 수량이 많지 않아 강이라고 하기에도 머쓱하지만 역사적으로 알천은 매우 관리하기 까다로운 강이었다. 비가 많이 왔다 싶으면 범람해 홍수가 나기 일쑤였고 또 어떤 때는 운명을 가르기도 했다. 북천을 따라 걷는 경주길 3-8코스를 소개한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 잊지 마 후손들아  _알천제방수개기


경주 시내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길엔 무심코 지나면 그저 바위로만 보이는 곳이 있다. 알천제방수개기라는 이름의 문화재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숙종대 무너진 알천의 제방을 보수하여 고친 내용을 적고 있다. 당시 제방이 무너진 이유까지는 적혀있지 않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경주 지역의 농경지 현황을 살펴볼 때 무리한 경작지 확대로 인한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둑 일부에 물길을 내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결국 제방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그저 바위 덩이로 보이지만
문화재 안내문과 함께
바위에 글자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다


내용 중에 언제 쓴 것인지 명확하게 적혀 있어 1707년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후로 계속 이 마애석각이 전해져 온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 잊히기 시작했고 1980년 발견될 때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흔히 경주는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온다고들 한다. 실제로 터파기 공사를 하다 문화재가 나오는 경우는 부지기수고 등산을 하다, 산책을 하다 토기 편이나 기와조각, 석물의 부재 같은 것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중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나 역시도 경주 곳곳을 다니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위들을 유심히 보기도 한다. 혹시 아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될지!


경주길을 걷는 사람들도 누구나 위대한 발견자가 될 수 있다. 


알천제방수개기를 보고 단순히 아, 제방이 무너져서 고쳐지었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이곳은 별 의미 없는 장소가 된다. 종이가 귀한 삼국시대도 아닌 조선시대에 굳이 제방을 수리한 기록을 이렇게 바위에 새기면서까지 남겨야 하는 이유는 그다지 없으니까. 


어떤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그 인물의 업적과 생애를 기록한 비석을 세우는 것과 책으로 그의 전기를 엮어내는 것은 내용은 비슷해 보여도 가져오는 결과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지금처럼 기록의 수단이 다양하고 전파성이 높은 경우라면 상관없겠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종이라는, 책이라는 형태로 남겨두었을 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이 불에 타 유실되거나 손상되어 버리면 기록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반면 바위에 새긴 글은 누군가 고의로 바위를 파손하지 않는 이상,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바위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글이 사라질 이유가 없다. 북천의 홍수는 조선시대에만 일어났던 특별한 것은 아니었고 제방을 쌓는 것 역시 알천제방수개기에서도 보이듯 고려시대 때 쌓았다고 하니 이후로도 여러 번의 보수작업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바위 글을 새기면서까지 기록을 남겼을까. 

물론 당시 그 이유에 대해서 남겨놓지는 않아서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무너진 제방을 보수했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니라 후손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선후기 농업기술의 발달과 상업 활성화 그리고 대동법의 시행은 쌀이 오늘날의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쌀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되자 쌀을 경작하기 위한 경작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었을 것이고 쌀농사에는 필연적으로 농업용수를 확보가 따를 수밖에 없기에 우후죽순 늘어난 경작지에 물을 대기 위해 제방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그러니 북천의 제방이 무너진 것은 자연재해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사람의 욕심 때문이었다. 결국 일부의 욕심은 제방의 붕괴라는 다수의 피해로 이어졌고 그런 점들을 경계하기 위해, 후손들에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 위해 이렇게 바위에 내용을 새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명확하게 이렇게 사람들의 욕심으로 제방이 무너졌으니 후손들아, 너네는 그러지 말거라 이렇게 적었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역시나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방 붕괴의 직접적인 범인을 특정하기 어려웠거나 혹은 당시 권력자와 연관되어 있어서 바위에 새길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잘못한 사람이 고위 공무원인데 하급 공무원이 저 사람 잘못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글을 새깁시다.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보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이자 관료제 사회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곳 알천제방수개기가 알게 해 준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현실화하지 않으면 그저 공상에 불과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은 의미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생각에서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길 것. 그러다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행운과 변화가 내게 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반면교사의 삶은 살지 말자. _헌덕왕릉


경주 헌덕왕릉


알천제방수개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왕릉이 한 곳 있다. 바로 신라 41대 왕인 헌덕왕의 무덤인 헌덕왕릉이다. 경주에 있는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이 특정되는 왕릉은 몇 안되는데 헌덕왕릉은 그중 하나다.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왕릉의 위치와 현재 위치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헌덕왕이 즉위하던 시기의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안정기를 지나 혼란기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헌덕왕의 즉위과정을 살펴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거나 형으로부터 이어받는 그런 형태가 아니라 조선시대 세조와 같이 조카였던 어린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즉 반란으로 왕이 된 인물. 세조는 그런 자신의 결정적인 흠을 메꾸기 위해 여러 개혁적인 정책과 함께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쓰기라도 했지만 헌덕왕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시대엔 흉년과 불안한 징조들이 끊이지 않았고 신라가 다시 사분오열 될 뻔한 내부 반란도 있었다. 


이곳 북천의 범람으로 인해 왕이 되지 못하고 지금의 강릉 지역인 명주 지역으로 옮겨가 유력한 호족이 되었던 김주원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와 왕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인물은 38대 원성왕이었다. 사실 원성왕보다 김주원이 먼저 왕이 될 사람으로 지목되었는데 당시 김주원의 집은 지금의 북천 북쪽에 있었던데 반해 왕궁은 현재 월성인 북천 남쪽에 있었기에 강을 건너야 했다.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달을 받고 왕궁으로 가던 중 전날 내린 비로 북천 강물이 불어 도저히 강을 건너갈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김주원을 왕의 재목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계시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했고 대신 2순위였던 원성왕이 자리에 올랐다. 


아니, 강물이 불어났다고 왕이 되지 못했다니.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날까. 하지만 기록상으로는 그렇다. 실제로 강이 불어나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권력다툼에서 김주원 측이 패배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역사나 그렇듯 왕이 될 재목이 사람이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왕이 된 사람에게 가장 큰 경쟁자이자 제거 대상 1순위라는 말과 같다. 나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니까. 그래서 김주원은 스스로 유배나 다름없는 지금의 강릉 지역으로 자신의 터전을 옮겼고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놓이고 하면서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남쪽이든 서쪽이든, 강릉은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방어에는 천혜의 요새지만 반대로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김헌창은 40대 애장왕 시기 지금의 국무총리 격인 시중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헌덕왕이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되면서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나 지금의 광주 지역인 무진주의 지방관으로 쫓겨나게 된다. 자기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면 둘째 아들이기는 했지만 왕자였을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면 헌덕왕의 즉위는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다. 

 이후 헌덕왕대에도 다시 시중을 맡기는 했지만 헌덕왕과의 갈등으로 오래가지는 못했고 지금의 진주 지역인 청주 지방관으로, 마지막으로는 지금의 공주지역의 웅주의 지방관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신라 역사상 최대의 반란인 김헌창의 난을 일으킨다. 웅주에서 반란을 시도한 김헌창의 세력은 신라의 절반에 가까운 영토를 확보할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그의 기반이 웅주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김헌창이 세운 국가인 장안국 영토의 대부분은 과거 백제지역이었던 전라, 충청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김헌창에게 호응했다는 것은 당시까지도 백제인들에게 신라의 존재는 납득이 아닌 인내가 아니었을까 싶다. 언젠가는 다시 백제가 일어나리라는. 


하지만 반란은 채 2달도 되지 않아 진압되고 말았다. 지금의 양산과 경산지역까지 기세를 넓힌 반란군이었지만 신라 중앙군의 전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급속히 무너졌다. 당시까지 살아있었던 아버지 김주원은 강릉 지역에서 어떤 호응도 하지 않았다. 아마 김헌창의 반란이 실패할 것으로 보였거나 혹 잘못되더라도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요한 방어선이었던 보은의 삼년산성이 함락당하고 곧이어 장안국의 수도였던 웅주성까지 신라군이 집결하면서 결국 김헌창은 자신의 반란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도자가 사라진 반란군은 급속히 궤멸되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비록 짧은 시간 내에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옛 백제의 영토 대부분이 반란군 세력에 동조했다는 것은 신라 조정입장에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삼국통일로 겉으로는 삼한이 하나가 되었지만 여전히 진정한 통일은 이룩하지 못한 셈이었다. 그리고 불과 100여 년 뒤 이 지역은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다시 삼국은 분열된다. 


비록 난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헌덕왕은 이후 국가정비를 위해 별다른 시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하다 못해 김헌창의 난으로 백제 지역 주민들의 민심이 드러난 만큼 직접 지역을 순시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등 보다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었어야 했지만 그러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헌덕왕 재위 시 기록을 보면


헌덕왕 7년 서쪽 변경에서 기근으로 인한 도적 봉기가 있어 군대를 보내 토벌하다

헌덕왕 9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 구휼하다

헌덕왕 11년 초적이 일어나 도독과 태수에게 잡도록 명하다

헌덕왕 13년 기근으로 자손을 팔다


등 나라 경제가 매우 어려웠음을 나타내주는 내용들이 남아 있다. 


당시 경제의 근간은 농사였기에 가뭄이나 장마로 인한 생산성 저하로 경제 위기가 올 수는 있지만 흉년이 매년 반복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결국 지배층의 무능으로 인해 다수의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는 이야기. 특히 초적으로 대표되는 도적집단의 등장은 생계를 위해 빚을 낸 사람들이 불어 가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나타난 세기말 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초적의 등장은 본래부터 도적질을 하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집단화된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수의 민중이 동원되는 이러한 형태의 민란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인 구호에 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너진 경제 상황으로 인해 일어나는 상황이 대다수다. 


실제로 헌덕왕 이후 100년도 채 되지 않아 지방에서 초적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신라 조정은 이를 토벌할 능력이 되지 않아 지방 호족들의 군사력으로 해결하게 되면서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역사에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그가 세조처럼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보다 적극적인 개혁정책과 위기가 몰려오던 신라를 다시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아마 후삼국은 등장하지 않았을 지도, 아니 그 시기가 조금이라도 더 늦춰지면서 역사의 향방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헌덕왕의 삶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군주


반면교사.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말이지만 그의 반의어는? 

다른 이의 부정적인 면을 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한다는 뜻인데

그럼 반대로 다른 이의 좋은 점을 보고 배우는 것은 무엇이라 할까?


글자 하나 차이다.

바로 정면교사.


3-8 코스의 두 장소

알천제방수개기와 헌덕왕릉 모두 반면교사와 관련 있다.


다음에 이어질 두 장소는 이와는 반대로 정면교사와 관련 있는 장소들이다.



헌덕왕의 인물됨과는 별개로 이곳의 소나무숲은 겨울에 산책하기에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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