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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수 Mar 13. 2023

3_벚꽃이 피면 월성을 걸어요

경주길 3코스 월성

(여기서 소개하는 경주길이라는 명칭은 현재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도보여행길이 아닌,
글쓴이가 경주의 곳곳을 다니며 만든 명칭임을 밝힙니다)



예전에 누가 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어디예요?라고 물으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림이요"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요즘 황리단길이 새로운 명소로 입소문이 나면서 경주 여행 1순위였던 첨성대가 조금 밀리긴 했지만, 여전히 첨성대가 있는 동부사적지대 일원은 경주 방문 필수 인증코스처럼 남아있다. 1년 365일 하루도 첨성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는 사람이 없는 날이 없을 정도로 첨성대는 경주의 상징이자 곧 그 자체가 경주가 되었다.


첨성대=경주


 첨성대를 보고 나면 이어지는 코스가 예전에 안압지로 불렸던 동궁과 월지 방향 / 월성 혹은 교촌마을로 향하는 코스 크게 두 군데로 나뉘는데 월성 쪽으로 가다 보면 있는 작은 숲이 바로 계림이다. 있는데 유심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이 숲을 나는 참 좋아한다.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1300년이 넘은 회화나무와 내물왕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내물왕릉이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적으로 지정된 문화재라는 의미를 떠나 이곳에 있는 수많은 고목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마치 500년 전, 10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숲 속과 숲 밖이 다른 세상인 것 같은. 겨울은 겨울대로,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 또 가을은 가을대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한 가지 딱 아쉬운 점이 있다면 봄을 대표하는 꽃인 벚나무가 이곳엔 없어서 만약 여기 계림에 아주 오래된, 제주에 있는 200년이 넘은 왕벚나무처럼 그렇게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벚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곤 한다.


오래된 나무들 덕분에 마치 다른 세상으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느낌


계림의 가을


하지만 그런 아쉬움을 근처 월성에 오르면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 월성 해자 복원 공사를 하면서 예전 월성 성벽에 길게 늘어서 있었던 벚나무는 안타깝게도 모두 베어지고 말았지만, 사실 난 봄이 되면 오래된 벚나무들이 월성 성벽에 피어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혹 이 벚나무들이 일제가 경주의 문화재를 관람화했던 과거의 모습들처럼 그러한 의도로 심었던 것은 아닐지,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지만,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이러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고 단순히 과거의 모습대로 성벽을 복원한다는 이유로 모두 베어지는 게 정말 안타까웠다.



발굴이 한창 진행 중인 월성


옛 신라의 궁궐이었다고 전해지는 월성은 꽤 오랜 시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발굴이 완료되면 월성 일대가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아무런 사료적 근거 없이 그저 '보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진 월정교 복원처럼 신라 왕궁을 복원한다고 이상한 건물들을 만들거나 하는 행정은 부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거의 모습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채로 진행하는 역사의 복원은 그저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창조해 내는 것일 뿐. 차라리 지금의 모습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과거는 어떠했을까 저마다 상상해 보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황룡사지 역시 누군가는 9층 목탑을 현대기술로 복원해 내는 게 진짜 황룡사의 역사를 유지하는 게 아니냐고 하지만 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도면이나 그림,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만으로 만들어낸 황룡사탑은 시간이 흘렀을 때 오히려 부끄러운 역사로 생각하지 않을까. 오히려 지금 남아 있는 금당터, 건물터 언덕에 앉아 얼마나 큰 탑이 있었을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황룡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황룡사지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황룡사지는 비어있음으로 인해 채울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월성의 벚나무는 한눈에 보아도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다. 넓지는 않지만 '벚나무숲'을 이루고 있는데 대릉원 옆 돌담길이나 첨성대 옆 산책로에 피는 벚꽃과는 그 크기부터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곳 벚나무숲을 둘러보고 왼쪽의 성벽으로 올라 계림과 첨성대 일원을 한눈에 굽어볼 수도 있다. 언덕을 올라와서 이어지는 산책로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에 올라 옛 서라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다. 바람이 선선하면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을 멈추기에도 참 좋다.



저 벤치가 생각보다 참 좋다



이른 아침 월성을 가보면 산책로를 한 바퀴 빙 돌며 산책하는 주민분들이 종종 보인다. 만들어진 산책로가 아니라 1000년 전 만들어진 궁궐에서 아침 산책이라니! 경주에 살면 스케일이 다른 궁궐 산책을 할 수 있다. 시내 쪽에 숙소를 묵는다면 꼭, 아침의 월성 산책을 추천한다. 어디에도 없는 이런 최고의 아침산책 코스를 경험해보지 않고 그냥 경주를 떠나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고요한 월성의 둘레길을 한 바퀴 걷고 나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짐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배가 고파 온다면 인근 콩국 집에서 따끈한 콩국 한 그릇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는 것도 좋다.



석빙고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월성을 한 바퀴 둘러보면
이렇게 교촌마을과 너머로 보이는 경주의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경주라는 도시가 가진 여러 장점, 관광지로서의 장점이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특별하다고 여기는 하나는 시간여행이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고 내가 멈추고 싶다고 멈출 수 없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들과 마주하는 순간 지금의 내가 아닌, 본 적도 없는 과거의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경주다. 과거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이 함께 흐르는 곳. 그래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과거로 떠나 상상 속에서 그 시간 속에 나를 놓아둘 수 있는 곳. 그게 경주 여행의 또 다른 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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