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지병으로 죽었다.
아들과 손주가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살기로 했다.
아들이 일을 하러 갈 동안 어린 손주를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며느리가 죽은 마당에 장인, 장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은 아들 입장에서 불편하기도 했을 것이고, 며느리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장인, 장모와의 연도 끊겼다고 느꼈을 것이다.
아내를 잃은 아들과 어머니를 잃은 손주의 상한 얼굴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들은 결혼하기 전까지 나와 가까운 사이였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아들의 관계를 부러워했다.
‘딸 같은 아들이네’, ‘딸보다 낫지’
아들은 여느 남자아이와는 달리 엄마인 나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었다.
아들은 훌륭하게 자라 주었고, 나의 자랑이었다.
자랑이면서 동시에 나랑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아들이 결혼을 전후로 나랑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자 한 여자의 남편인 아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몇 년 후 아들은 손주를 낳았다.
나의 아들을 닮아 너무나 예뻤다.
책임 없는 쾌락이라고 할 정도로 예뻐해 주기만 한 존재였다.
자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느리가 육아휴직에서 복직 후 친정에서 손주를 봐준다고 했다.
애초에 아들의 신혼집이 친정집 근처이기 때문에 친정집의 손을 빌리기 쉬웠을 것이다.
나는 자주 보지 못했지만, 사돈은 나의 손주를 자주 보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쯤 여러 무당집을 전전했다.
무당에게 어쩔 수 없는 나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문의했다.
그 쌍년이 나의 아들을 빼앗아 갔다.
그년에게서 되찾고 싶었다.
아들이 처음 인사 시켜줬을 때부터 그년이 맘에 들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년이 내 아들과 만난다는 게 더러웠지만, 어차피 곧 헤어지려니 하고 놔두었고, 좋은 예비 시어머니 역할만 잘 연기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년은 아들과 나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고, 기어코 아들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의 손주까지 뺏어갔다.
하늘이 나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내 아들인데
용한 무당을 찾았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이번에야 진짜 용한 무당을 만났다.
무당에게 수천만 원을 들었지만, 나의 아들과 손주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무당의 굿은 그년에게 제대로 살을 날렸고
드디어 나의 아들과 나의 손주를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