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보석감정사 Gemologist

by 류지숙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00년대 초반에는 많은 대학생들이 어학연수를 떠났다. 누구는 호주로 누구는 뉴질랜드로 또 누구는 미국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영어공부라는 명목으로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명목이 필요했다. 그냥 어학연수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외국에 가고 싶은 내 마음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찾게 된 게 보석감정사 자격증이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전업을 하셨다. 커서 들은 이야기로 아빠보다 젊고 또 대학을 졸업한 분이 상사로 부임했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것의 의미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진 두 번째 직업이 귀금속 중상인 이었다. 아빠가 하시는 일이 정확히 어떤 일인지 이해하기에 나는 어렸지만 양복을 입고 가방 가득 보석을 들고 다니시는 아빠가 신기했다.


아빠는 흔히 말하는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셨다. 종로 3가 앞쪽에 쭈욱 늘어져 있는 가게들 뒤쪽으로는 도매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작은 골목, 골목 사이로 순금 도매업자, 시계도매업자, 손 수리공방, 귀걸이 전문점 등이다. 이곳에 오래 드나들며 경험을 쌓아야 어디에 뭐가 있고, 어느 제품은 어느 가게에 주문을 넣어야 하는지, 수리가 어려운 제품은 누구에게 맡기면 되는지 알 수 있다. 아빠는 항상 양복 주머니 안쪽에 작은 수첩과 펜을 넣어 다니신다. 본인의 머리를 믿을 수 없다며 중요한 일은 항상 메모를 하는 것이다. 아빠의 꼼꼼한 일처리는 같이 일 하시는 분들께 잘 알려져 있었다. 어느 도매업자 분께서는 아빠의 꼼꼼함에 치를 떨며 저분의 부인되시는 분은 스트레스로 빼빼 말랐을 거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IMF바로 직전 투자를 시작했던 아빠는 돈이 종이 쪼가리가 되는 경험을 해야만 했고, 우리 가족은 살고 있던 집을 팔아 작고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 했다. 상심이 컸던 아빠는 한 동안 하시던 일에서 손을 떼셨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쌓아온 신뢰는 아빠를 저버리지 않았다. 귀금속은 작은 아이템 하나, 하나가 돈이기 때문에 신뢰가 정말 중요한 업종이다. 아빠가 재기를 할 수 있게 많은 도매업자 분들께서 3개월, 많게는 6개월씩 물건을 빌려 주셨다. 그렇게 중상인으로서의 아빠의 삶은 마무리가 되었고 보석가게 사장님이 되셨다.


내가 나온 학교는 남영동에 있는데 종로와 가깝기 때문에 나는 종종 아빠의 신부름 꾼이 되곤 했다. 한 번은 행운의 열쇠 열 돈을 찾아 돌아와야 했는데 돌아오는 길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가방을 꼭 끌어안은 전철 안에서 내 앞에 서는 어느 누구 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가게를 도와주던 엄마를 따라 종로에 일을 보러 다닐 때면 아빠랑 거래를 하던 다이아몬드 도매 가게에도 종종 들르곤 했다. 그곳은 특히 GIA 감정서를 받은 다이아몬드를 다루는 곳이다. 그렇게 익숙하게 듣던 GIA가 교육기관을 갖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학교의 본사는 미국, 캘리포니아

얼마나 심장 뛰는 단어인가! 캘 리 포 니 아


이거다 싶었다. 아빠라면 분명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다.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보석감정사 자격증 과정의 학비와 기간, 학교를 지원하는데 필요한 서류 등등 모든 조사를 마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냈으나 이제 막 가게를 새로 시작한 부모님께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이통통신사 고객센터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일이 내 적성에 맞았던 것이다. 상담을 가장 많이 한 사람 순으로 매달 인센티브가 지급이 됐는데 그 인센티브를 첫 달부터 받았다. 6개월 정도 일하고 학업이랑 병행하기가 힘들다고 인사 담당자께 말씀드렸더니 근무시간이 적은 야간근무로 옮겨 주셨다. 늦은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4시간만 일하면 되었다. 때마침 영등포에서 출발하는 1시 막차가 1시 15분에 노량진 앞을 지나갔다. 그렇게 20살, 나의 겨울은 막차에 몸을 싣을 채 보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자유,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홀로서기였다. 전 세계의 20대 초반의 혈기 넘치는 청춘이 모인 어학원 시절은 매일매일이 파티였다. 미국에서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GIA에서의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8시 반에 수업이 시작되고 3시 반에 끝나는 강도 높은 일정이다. 지각을 다섯 번 이상하면 제적이 됐다. 학교생활은 고등학교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20대 초반의 성인들이 대다수였기에 더욱 강도 높은 교육을 시키는 듯했다. 이 학교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은 마지막 시험이다. Pass or Fail로 총 5번의 시험 기회가 주어지고 10개의 봉투를 선택해서 10개의 보석 모두를 정확하게 맞춰야 시험에 통과할 수 있다. 보통 한 반에 20명 정도로 시작해서 중간에 이탈자 1-2명 정도이고 마지막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도 1-2 정도 나오는 걸로 알려져 있다. 우리 반에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친구가 있었는데 다시 학비를 내고 같은 과정을 재 수강해야 했다. (인도에서 졸업식을 보러 부모님이 오셨는데 졸업을 못하게 된 것이다.)

학기 도중에는 매주 금요일 퀴즈를 본다. 처음 3개월은 아무리 전 날, 새벽 3시까지 공부해도 시험성적이 처참했다. 60점 맞은 날은 엉엉 울었더랬다. 어학원만 다니던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보석감정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각각의 보석에 대해서 영어로 배우는 전문 용어들이 익숙해 지기까지 대략 3개월이 걸린 것 같다. 다행인 건 반 친구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우리 반의 대략 1/3 정도가 인도에서 온 친구들이었고 아시아에서 온 건 나와 일본이 친구 한 명, 아빠가 사파이어 광산을 가지고 있던 브라질 친구 한 명, 나머지는 미국사람이었다. 아니다, 캐나다 친구도 한 명 있었다. 같은 반 친구에게는 내가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중요하지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꿈같은 6개월의 학교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야 나는 보석감정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학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캐나다에 와서도 보석감정사로 일할 수 있었으니 이 학교에 가기로 한 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빠께 당신의 삶이 나의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으며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지 보석감정사가 됨으로써 보여드렸다는 것이다.


나는 보석감정사이다. 그리고 우리 아빠의 자랑스러운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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