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미 여행기 (3)
"추운 겨울, 몸져누우신 어머니가 좋아하는 딸기를 찾기 위해 산을 헤매던 소녀는 추위를 잠시 피하려고 동굴에 들어갔다. 캄캄한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이상한 문이 있고 그 문을 열었더니 꽃이 피고 온갖 과일이 그득한 별천지가 펼쳐져 있다"
전래동화 같은 곳에서나 있을 법한 얘기지만, 아타미 여행에서 만난 벚꽃은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던 내게는 동화 속 별천지 같았다.
아타미 여행 이틀째, 한적한 온천 마을에서 할 일은 그저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일뿐이지 싶었다. 해변에서 놀아야지 하며 호텔을 나서는데 연변에서 온 호텔 직원 (전날 아타미 역으로 우리를 마중 나왔던 분)이 "기차 타고 한 시간만 가면 벚꽃 좋은 곳이 있다"며 가와즈 사쿠라 마쯔리를 소개해줬다. 사람 북적이고 줄 서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나이지만, 오랜 겨울 기운에 지쳐 화사한 벚꽃이 너무 보고 싶어 졌다. 그렇게 정말 즉흥적으로 아타미에서 남서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원래 역에서는 세 곳만 정차하고 도착하는 급행 기차표를 왕복으로 끊었던 것 같은데 일본말을 잘 모르는 우리는 모든 정차역에 서는 완행으로 한 시간 반을 꼬박 달려 가와즈에 도착했다.
여의도 공원 정도 될까 싶은 작은 마을에 강을 따라서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둑방 길에 벚꽃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마주하고 지역 특산물을 파는 임시 상점들이 줄을 이었다. 역시 축제엔 먹을 것이 빠지지 않는 법.
여의도에서 10년을 살다 보니 매년 열리는 벚꽃 축제에 둔감하게 된다. 챙겨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오래된 아파트는 동 사이 정원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아침저녁 그 벚꽃만 보아도 넉넉하다. 그러다 마음 내키면 여의도 둘레길 잠시 도는 것으로 매년 심드렁하게, 하지만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벚꽃 축제를 보아왔다.
하지만, 벚꽃이 일본의 꽃이어서 일까? 가와즈 벚꽃은 정말 예뻤다. 여의도에서 내가 보아온 꽃은 잎이 하얀색이었지만 가와즈의 벚꽃은 분홍 빛이었다. 복숭아꽃 색깔이랄까. 분홍빛 생기를 가득 품고 하늘거리는 꽃을 보니 저절로 마음도 들뜨고 겨울 내 움츠렸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더욱이 벚꽃이 강물에 어린 풍광도 좋았다.
벚꽃은 어느 곳에 피어도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굳이 여의도 벚꽃 축제와 비교하자면,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그다지 시끄럽지 않았고, 편안했다. 벚꽃길 따라 느긋 느긋 걸어 다니며 주변 장터에서 시식용으로 놓아둔 빵이며 구운 생선, 해초류 등등 맛보는 재미가 있었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이다. 벚꽃 그늘에 앉아서 그림 그리는 아저씨, 훈련된 원숭이 한 마리로 서커스를 하는 여자의 낭랑한 목소리, 곤약을 된장에 찍어서 먹는 미소곤약의 맵지 않지만 매콤 달콤한 그 맛, 카메라를 든 아빠를 보며 어색한 미소 짓는 아이의 귀여운 표정 - 그 모든 느낌이 사진 곳곳에 배어 있다.
가와즈의 벚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본 벚꽃 중에 제일 좋았다. 가와즈 역에서부터 한걸음, 한걸음 떼며 보았던 풍광들, 맛보았던 모든 것을 부채 살에 담아 접어 놓아야 겠다. 언젠가 꽃이 그리울 때, 내 인생의 봄날을 추억할 때, 혹은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부채가 펼쳐져 가와즈의 벚꽃 바람을 선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