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JS Aug 09. 2020

세상 속에 내던져진 인간, 그 비극에 대해

<세일즈맨의 죽음> - 아서 밀러


거대한 시스템에 한낱 톱니바퀴로 전락한 인간과 그의 몰락에 대해 조망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그때와 같은, 혹은 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세일즈맨 윌리는 삼십 년이 넘는 회사 생활을 해온 육십 대 늙은 남자이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곁을 지켜온 순종적인 아내 린다와 그의 희망과 분노를 짊어진 두 아들 비프와 해피뿐이다. 그는 아내에게 냉장고 수리비와 보험금 조차 가져다주지 못하는 퇴물이 된 지 오래다. 장남 비프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뒤틀린 아집만이 오직 그를 일어서게 하는 희망이다. 게다가 그의 맹목적인 아집과 환각 증세는 나날이 심해진다. 아들과의 관계는 제대로 된 소통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달았다.


첫째 비프는 윌리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성공이라는 꿈을 이루게 해 줄 희망이자 분신이었지만, 서른이 넘은 그는 제대로 된 일자리 조차 없으며 도벽으로 감옥을 들락거리는 신세이다. 동생 해피 또한 허풍을 떨며 부모의 비위만 맞출 뿐 그날그날 되는대로 여자와 술로 현실을 도피하는 처지이다.


큰 아들 비프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긋나 버린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수정하고 싶어 한다. 뭔가 큰 일을 할 사람처럼 분에 넘치는 기대를 받은 비프는 부모의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고등학생 이후 완전히 고장나버린 제 삶의 원인을 아버지에게 돌림으로써, 마지막 부자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분노는 극의 대미이다.


가끔 윌리에게 보이는 형, 벤의 환각은 그가 현재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남아있다는 걸 보여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나아질 기미가 없는 자신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들이 최고로 잘 나갔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따금씩 그때를 회상하는 윌리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시민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전성기를 떠올리며, 환상의 곁가지를 뻗어 나간다. 시궁창 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망각하게 해주는 망상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탱하게 하는 모르핀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연극으로 상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명의 인간이 아닌 한 낱 부품에 불과하게 된 자본주의 소시민의 비극이자 고된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약 백 년 동안 수많은 윌리와 비프의 슬픔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지만 기차는 계속해서 달려갈 뿐이다. 그리고 현재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가정 불화와 부모 자식의 갈등 문제는 각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가족이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을 포기하게 하는 절망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크던 작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상처는 계속해서 생긴다. 하지만 인간에겐 소통과 이해라는 카드가 존재한다. 그것은 무너진 인간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상처가 썩어 곪기 전 조치를 취한다면 한번 무너진 사람도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한낱 인간의 삶이란 끔찍하고 조악해 보일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티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저마다 존재한다. 결국 인생이란, 지루한 반복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이들의 과거, 그리고 현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