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있어요 #20] 잡다한 비행 이야기 일문다답
갈 때까지 가보자 이거지? 좋다. 어디 상상해보자. 이륙하자마자 새 때와 부딪혀 엔진이 모두 고장 난 예는 설리 기장의 생생한 영웅담이 있으니(영화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참조), 나는 좀 다른 시나리오를 골라보겠다.
소설을 쓰기에 앞서 테크니컬 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자동차와 잠시 비교해보겠다. 고속도로 주행 도중 엔진 시동이 꺼지면? 아마 핸들이 록(Lock)되고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배터리가 비상 전기를 공급할 것이다.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엔진이 꺼지면 전기계통, 조종계통, 에어컨(여압) 계통이 모두 작동을 잠시 멈춘다. 하지만 자동차던 비행기던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계속 움직인다. 자동차는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 것이며, 비행기는 기수가 천천히 내려갈 것이다. 마치 장난감 자동차나 종이비행기처럼 물체는 가던 길을 계속 간다. 그 사이에 운전자나 조종사는 통제불능 상태를 통제 가능한 상태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악화되기 전에 말이다.
말은 쉽지만 일단 멘털부터 잡아야 한다. 자동차던 비행기던 죽음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크리티컬 한 상황이므로, 살고자 하는 본능을 다스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럼 어디 한 번 가보자. 쫄깃쫄깃하게. 큐.
잠깐, 이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비행기는 에어버스 A330이다. 기종마다 시스템과 절차가 다르니 이점 감안하고 읽어주시라. 그리고, 비현실적인 상황을 억지로 끼워 넣어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상당히 떨어짐을 미리 인정하니 항덕들께서는 좀 살살 비판해주기 바란다. T.T
해피 항공 111편은 앵커리지를 출발해서 인천공항을 향해 야간비행을 하고 있었다. 캄차카 반도 남쪽을 지날 무렵, 긴급 기상경보가 발령되었다. 거대한 화산 폭발로 화산재 구름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베테랑 '안전방' 기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창밖을 살펴보았다. 초승달마저 져버린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위치랑 가까운 것 같은데 화산구름이 어디까지 올라온 거야? 설마 아직 40,000피트까지는 안 올라왔겠지?"
"안 기장님, 제가 지금 좌표를 받아 위치를 그려보겠습니다."
'강하율' 부기장이 내비게이션 디스플레이에 표시하기 위해 좌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강 부기장은 아직 새내기 티를 벋지 못한 풋풋한 청년이었다. 그때 비상 주파수에서 긴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본항공 878편, 팬팬*! 팬팬! 팬팬! 화산재 조우로 경로를 이탈한다. 060 방위각으로 우선회를 한다."
*팬팬(Pan-Pan): 표준 무선 긴급 신호. 비상을 의미하는 '메이데이(May-day)'보다 한 단계 낮은 신호이다.
"헐. 저 비행기 고도가 얼마지?"
"31,000 피트 같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낮은 고도입니다. 여기까지는 아직 안 올라오겠죠?"
곧바로 도쿄 관제소에서 긴급 연락이 왔다. 일본항공 비행기가 긴급 유턴을 해버리자, 50마일 정도 뒤따라가는 해피 항공 111편의 위치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강 부기장이 대답을 하려는 순간, 안 기장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강 부기장의 어깨를 탁탁 쳤다.
"어... 어.... 엔진 N1*이 이상해. 유황 냄새도 난다."
*N1: 제트 엔진 주축(Main Shaft)의 회전을 나타내는 계기. 굳이 따지자면 엔진 RPM 같은 것이다.
"속도계도 이상해요. 속도가 너무 적어요!"
속도가 평소보다 낮게 지시되고 있었고, 엔진 계기는 뭐 잘못 먹고 체한 것처럼 꿀렁대고 있었다. 안 기장은 얼른 랜딩 라이트를 켜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칠흑 속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던 하늘이 어느새 회색 함박눈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화산재 구름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얼른 빠져나가자! 팬팬 보고해!"
안기장이 급하게 방위를 틀어 180도 유턴을 시작했다. 180도 유턴은 화산재 조우 시 가장 먼저 실시해야 하는 초도 대처이다.
"팬팬! 팬팬! 팬팬! 해피 항공 111편 화산재 조우로 우선회 한다! 고도 39,000피트, 위치는 북위 XXXX.X 동경 XXXXX.X 오버!"
"마스크도 쓰자! 산소마스크!"
급하게 선회를 하면서 주섬주섬 산소마스크를 썼다. 답답한 마스크 고글 너머로 계기판을 보는데, 한참 동안 깔딱깔딱 거친 숨을 몰아쉬던 우측 엔진이 어느새 스르르 꺼지고 말았다. 경고 등과 함께 엔진 정지 체크리스트가 화면에 떴다. 강 부기장이 소리쳤다.
"엔진 페일! 체크리스트 스탠드 바이!"
"잠깐만! 왼쪽 엔진도....플리즈.. 제발."
안 기장과 강 부기장의 간절한 애원을 외면하고 곧이어 왼쪽 엔진도 시동을 멈추고 말았다. '껌뻑' 하는 소리와 함께 부기장 쪽 계기들이 모두 꺼졌다. 실내등이 모두 꺼지고 오직 기장 쪽의 계기들만 홀로 밝게 반짝였다. 엔진이 모두 꺼지면서 엔진이 더 이상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자, 비상 배터리가 전력을 아끼기 위해 기장 측의 계기만 남겨두고 조종실의 모든 전기를 차단한 것이다. 머뭇거리던 강부기장이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올 엔진 플레임 아웃(All Engine Flame-out)! 이제 어쩌죠?"
"천천히, 천천히 하자. RAT* 스위치 자동으로 켜졌지? 한 번 더 눌러서 확인 사살해라."
"네, RAT 스위치 온, 이그니션*(Ignition)도 키겠습니다."
*RAT(Ram Air Turbine): 쉽게 말해서 작은 바람개비 같은 것이다. 평소에는 날개 속에 숨겨져 있다가 비상시에 펼칠 수 있다. 엔진이 모두 꺼지면 전기와 조종 계통도 모두 먹통이 되므로 이 바람개비를 펼쳐 풍력으로 유압*을 살려내고 약간의 비상 전력을 생산하는 것이다.
*유압 계통(Hydraulic System): 대형 비행기는 조종면(에일러론, 러더 등), 랜딩기어, 브레이크, 스티어링 등등 조종과 관련된 대부분의 장치를 유압계통으로 움직인다. 이런 구동방식은 포클레인이나 크레인 같은 중장비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이사할 때 사다리차를 바닥에 고정하는 받침대도 유압계통으로 작동한다. 기계를 움직이는 관절 부위에 액추에이터(Actuator)를 달고 유압을 이용하여 액추에이터를 움직이는데, 전기 모터에 비해 훨씬 힘이 세서 크고 무거운 기계를 움직일 때 주로 사용한다. 액추에이터는 마치 실린더와 피스톤처럼 생겼다. 액추에이터 실린더에 유압관을 연결하여 특수 액체를 가득 채우고 펌프로 강한 압력을 가한 다음, 액체의 압력과 흐름의 방향을 조절하면 액추에이터가 밀었다 당겼다 하며 관절을 움직이게 한다. 혹은 잭 스크루처럼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기계를 상하 직선 운동으로 움직이게도 한다.
*이그니션(Ignition): 자동차 엔진의 점화 플러그와 같은 것. 처음 엔진 시동을 걸 때, 혹은 엔진이 불안정하여 꺼질 위험이 있을 때 컴버스쳔 챔버에 전기 스파크를 일으켜 연료가 잘 폭발하도록 한다.
몇 초후 RAT이 완전히 펼쳐져 작동을 시작하자 추가로 몇몇 전기계통이 살아났다. 유압이 다시 살아나면서 다시 비행기 조종이 가능해졌다. 안기장은 조종간을 좌우로 움직여보더니 충분하게 비행기가 반응하는 것을 확인하고 강부기장에게 말했다.
"아이 해브 컨트롤! 이제 비행기가 움직인다. 수동 조종으로 전환할게. 강부기장은 어서 메이데이 콜 하고, 체크리스트 준비해."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해피 항공 111편 모든 엔진이 꺼졌다. 엔진 재시동을 위해 급강하하고 있다."
강 부기장은 무선통신으로 비상을 선포한 후 체크리스트를 꺼내 들었다. 일단 어떻게든 엔진부터 살려야 했다. 엔진이 화산재를 먹은 상태라 재시동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시도해봐야 했다. 재시동 준비를 위해 추력 레버를 줄이고 연료 스위치를 껐다. 초시계로 30초*를 기다린 다음, 양쪽 엔진의 연료 스위치를 다시 모두 올렸다. 엔진 계기에 이그니션 불꽃이 튀는 것도 확인했다. 뚫어지게 엔진 계기를 쳐다보았지만 시동은 한 번에 걸리지 않았다. 연료 스위치를 끄고 다시 30초를 기다린 다음 다시 한번 연료 스위치를 올렸다.
*30초를 기다리는 이유는 엔진 속에 흥건하게 고여있는 연료를 밖으로 배출하기 위해서이다. 엔진이 꺼진 채 연료펌프가 계속 엔진 속에 연료를 주입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엔진 시동을 걸면 폭발이나 화재의 위험이 있다. 30초 동안 풍력으로 엔진이 회전하면 남은 연료가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기장님 속도를 올려주세요! 엔진 시동을 위해 300노트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고고도에서 시동을 걸 때는 바람의 힘(Windmilling)으로 엔진을 돌려야 하므로 가능한 빠른 속도가 필요하다.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고, 속도계의 지시가 300노트보다 느리자 답답한 마음에 기장을 다그친 것이다.
"아니야. 지금 피토 튜브(Pitot tube)*가 화산재로 약간 막힌 것 같아. 여기 속도계가 가리키는 속도는 실제 속도보다 느려. 이 정도 피치 자세면 300노트는 충분히 나올 거야. 조급해하지 말고 계속 시동 걸어 봐."
*피토 튜브(Piot Tube): 비행기의 속도를 측정하는 센서 같은 것이다. 스태틱 포트(Static Port)와 함께 비행기 외부의 공기 압력을 측정하여 속도와 고도 등을 표시해 준다.
비행기가 25,000 피트로 강하하자 이제 APU(Auxiliry Power Unit)* 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장치는 마치 작은 엔진과 같아서 작동하려면 시동을 걸어야 하는데, 전력이 부족한 상태라 배터리만으로 시동을 걸려면 어느 정도 공기 밀도가 높은 중고도 이하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이 25,000 피트이다.
*APU(Auxiliry Power Unit): 보조 동력장치. 작은 엔진 같은 것인데, 고용량의 전력과 고농도 압축 공기를 생산할 수 있어서 엔진 시동 보조 장치인 '엔진 스타터'를 움직일 수 있다.
"APU ON!"
APU가 켜지자 대부분의 전기가 모두 돌아왔다. 기내가 다시 환해지고 거의 모든 계기들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안 기장은 비행기의 기수를 들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풍력으로 엔진 시동을 걸었지만 이제는 APU 동력으로 엔진 스타터를 돌릴 수 있다. 스타터가 있으니 풍력을 내기 위해 고속을 유지할 필요가 없고, 속도를 줄여 강하율을 낮추니 활공 시간도 더 벌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가장 멀리, 그리고 오래 날 수 있는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진짜 활공이 시작된 것이다.
"활공 속도가 어떻게 되지?"
안기장이 열심히 시동을 걸고 있는 강부기장에게 물었다. 강부기장은 체크리스트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20,000피트 이하부터는 205노트를 유지하십시오!"
날개가 달린 모든 비행기는 무동력이라 할지라도 공기 역학적으로 활공을 할 수 있다. 끝내 엔진 시동에 실패한다면, 활공으로 착륙할 수밖에 없다. 안기장은 40,000피트에서 20,000피트까지 강하하는 동안 여러 가지 경우를 떠올렸다. 화산재를 먹은 엔진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바람으로 아무리 재를 불어낸다 하더라도 엔진 내부는 이미 상당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제는 안기장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만 했다.
안기장은 '정보안' 사무장을 조종실로 불렀다. 수동 조종을 하는 와중에도 직접 브리핑을 하며 비상착륙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정 사무장, 엔진이 끝내 살아나지 않으면 무동력으로 착륙을 해야 해요. 활주로를 벋어 날수도, 크래쉬 랜딩을 할 수도 있어요."
"기장님, 차라리 바다에 착수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요?"
"지금 겨울이라 파고가 매우 높고 수온이 낮아 위험해요. 태평양에 착수하면 아무리 육지가 가까워도 이 지역은 오지라고 봐야 해요. 요새 기상까지 좋지 않아 구조되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릴 수 있어요. 일단 어떻게든 캄차카 공항에 착륙을 시도할 거예요. 혹시 활주로에 내리지 못할 것 같으면, 사실 한 가지 옵션이 더 있어요. 캄차카 공항 근처에 '이바차만(灣)'이 있어서 여기에 착수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어요. 두 가지 옵션을 가지고 갈 겁니다. 활주로가 우선이고, 여의치 않으면 기수를 돌려 이바차만에 착수할 거예요. 착륙 5분 전까지는 착륙을 할지, 착수를 할지 결정 내릴 수 있을거예요. 차선책에 대비해서 승객들 구명복도 미리 입혀두세요. 수동 비행 중이라 내가 방송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니 사무장이 대신 승객들에게 정확하게 안내해 주세요. 아, 그리고 충격방지 자세도 잊지 마세요. 착수던 착륙이던 모두 해당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얼마나 걸릴까요?"
"엔진이 살아나지 않으면 한 12분~15분 정도 후에 착륙할 거예요. 타이머를 맞춰놓으세요. 5분 전, 3분 전, 1분 전 간격으로 카운트 다운해줄게요. 서둘러주세요."
"기장님, 죄송하지만... 이거 기도를 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저희 딸이 오늘 생일인데..."
"글쎄요... 교회에 다니신다면 나쁠 것도 없겠네요.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먼저 다 해놓고 기도하시기 바래요. 오늘 따님 생일파티에는 절대 못 가겠네요. 캄차카에서 영상통화라도 될지 모르겠어요."
안 기장은 정 사무장을 위로하거나 용기를 심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 사무장은 오히려 용기가 나고 안심이 되었다. 안 기장 저 인간이 인정머리 없이 태연하게 대꾸하는 걸 보니 복잡한 생각들이 다 사라지고, 과연 캄차카에서 인터넷이 터질지 안 터질지만 궁금해졌다.
강부기장이 스타터를 사용해서 계속 시동을 걸었지만 엔진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이제 활공으로 착륙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시간은 약 10분, 거리는 약 40마일(NM) 정도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서히 속도를 줄일 것을 감안하면 평균 강하율이 더 줄어들겠지만 안기장은 플러스 알파로 계산하기로 했다. 엔진이 꺼진 상태에서는 오직 고도가 에너지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마진을 갖고가야 한다.
15,000피트를 지나자 객실에 외부 공기가 들어오도록 공기 밸브를 열었다. 밸브를 열자 차가운 공기가 객실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기내 외 기압이 서로 다르면 탈출할 때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상 상황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 15,000피트는 아직 공기가 희박한 고도이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승객들이 산소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안 기장은 10,000피트 이하로 내려갈 때까지 산소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기로 했다.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어야 머리도 잘 돌아 간 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강 부기장은 아직 경험이 적어서 마스크를 쓴 채로 비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벋고 싶었지만 안기장이 쓰고 있으니 혼자 벋기도 애매했다.
조금 전 화산 구름을 만나자마자 유턴을 하면서 바로 캄차카 페트로파블롭스크 공항을 향해 비행해왔다. 언젠가 꼭 한 번 여행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제일 먼저 안기장의 머리에 떠올랐다. 다행히도 유턴을 하다 보니 북동쪽 150마일 정도에 기적처럼 놓여 있었다. 활공 거리는 바람이 없는 조건에서 고도 1,000피트당 대략 3마일(NM)로 계산한다(이건 평균 수치이므로 고도마다 단계마다 실제값은 다르다). 배풍까지 불어주니 충분히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다. 더구나 공항 활주로 방향이 340도이고 남쪽에 만(灣)이 있어서 여차하면 착수로 계획을 변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엔진 없이 활공으로 착륙한다는 것이 쉽게 말해 '힘 조절'인데, 이 힘 조절에 실패하여 활주로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착수로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 카드가 한 장 더 있는 것이다. 더구나 만 주변에 도시가 있어 구조도 용이할 것 같았다.
초 비상상황이다 보니 러시아 관제소는 모든 권한을 기장에게 주었다. 알아서 공항에 착륙하라고 허가를 했고 주변의 비행기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소방구조대도 소방차의 시동을 걸고 출동 준비를 마쳤다.
엔진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엔진 시동에 집중하던 강 부기장에게 안기장은 이제 조종실 착륙 준비를 하도록 지시했다. 수동 비행을 하다 보니 안 기장이 모든 준비를 직접 할 수 없었다. 강부기장은 착륙과 접근을 위한 셋업을 마치고 안기장에게 공항 절차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을 해 주었다. 그 와중에도 강 부기장의 엔진 시동은 멈추지 않았다. 콘트롤C, 콘트롤V를 반복하면서 엔진 시동을 계속 걸었다.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다.
10,000 피트가 되었을 때 비행기는 활주로로부터 약 20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고도가 적당해 보였다. 야간이었지만 다행히 맑은 날씨라 눈앞에 훤히 활주로 불빛이 보였다. 착륙하기 위한 속도로 감속을 시키다 보니 비행기는 적정 고도보다 점점 높아졌다. 15마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8,000피트였다. 강하율을 높이기 위해 랜딩기어를 일찍 내렸다. 랜딩기어는 비상 스위치*를 사용해서 내렸다.
*비상 스위치(Emergency Landing Gear Extention Switch): 래치를 열고 유압을 풀어 랜딩기어를 자체 무게로 자유 낙하시켜 내리는 것. 유압 계통의 동력을 항공기 조종에만 집중해서 쓸 수 있도록 세이브하기 위한 것이다.
랜딩기어가 내려오자 공기저항이 커지면서 강하율이 조금 더 깊어졌다. 5000~6000피트 정도가 되었을 때 안기장은 착륙을 자신했다. 사무장에게 '착수'가 아닌 '착륙' 5분 전임을 알렸다. 고도가 조금 높았지만 낮은 것보다 훨씬 낫다. 엔진 추력이 없을 때는, 낮은 것을 높이 끌어올릴 수 없지만, 높은 것은 아래로 내리 누를 수는 있다.
"앞바람이 좀 있으니 5도 강하를 타깃으로 할게. 분당 1,100~1,200 피트 강하율을 유지한다. 옆에서 속도 잘 봐줘."
"알겠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비행기의 활공 성능이 좋았다. 생각만큼 무겁게 떨어지지 않았다. 안기장은 좌우로 지그재그로 비행하면서 강하율을 높이려고 했으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강부기장이 조언했다.
"스피드 브레이크를 쓰는 게 어떨까요?"
"안돼. 속도가 급하게 줄어버리면 더 위험해. 활주로 길이가 3,400 미터니 여유가 있어. 좀 높게 들어가도 될 거야."
안 기장은 6마일에 2,500 피트를 게이트로 잡았다. 이 지점을 2,500 피트 이하로 통과할 것 같으면 기수를 왼쪽으로 90도 돌려 바다에 착수하려고 마음먹었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오히려 3,500 피트로 통과했다. 5도가 아니라 6도 강하각을 만들어야 했다. 기수를 더 내리고 강하각을 늘렸다. 어떻게든 착륙을 해야 한다. 단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다. 속도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마치 다이빙을 하는 것처럼 경사가 급하게 보였다. 평소 착륙할 때 강하각이 3도이니 두배는 더 가파르게 보이는 것이다. 작륙 1분 전에 마지막 방송을 했다.
"기장입니다. 충격방지 자세. 충격방지 자세. 브레이스 투 임팩트(Brace to Impact). 1분 전이에요."
승객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방송을 마친 안기장은 무덤덤하게 깊은 강하각을 유지했다. 승객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지만, 안기장은 그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 무거운 책임 때문에, 사람들은 활활 타오르는 영웅심과 꼭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에 감정이 복받칠 수 있다. 반대로 무거운 압박감에 도망치고 싶거나 승객이 다칠까 봐 겁이 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어느 쪽도 사람들을 살려내지 못한다. 안기장은 쉼 없이 센싱 하고, 계산하고, 결심하고, 반응했다. 어떤 목표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조작하고 행동했다. 불구덩에 뛰어드는 것은 투지이지만, 불구덩이에서 사람을 구해서 나오는 것은 냉정한 판단과 기술이다. 비상상황에서의 비행은 머리와 감각으로 하는 것이지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라고 안기장은 믿고 있었다.
"플랩 풀(Full)까지 내려줘. 그냥 한 번에 내려. "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떻게든 에너지를 줄여야 했고, 공기 저항을 늘이기 위해 플랩을 최대한 내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절차 위반? 절차를 위반하더라도 속도 부터 먼저 줄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강부기장이 한꺼번에 플랩을 최대로 내렸다. 이제 다시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안기장은 강하율을 유지하기 위해 바쁘게 조종간을 움직였다. 200피트까지 내려오자 강부기장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 음.... 피치..."
지금까지 이런 깊은 각도로 활주로에 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강 부기장은 안 기장이 기수를 좀 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에 저절로 '피치'라는 말이 나왔다. 침착한 안기장은 100피트 아래로 비행기가 내려오자 그제야 기수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땅에 처박을 것 같던 비행기가 크게 원을 그리며 기수를 들자 강 부기장은 속이 메스꺼웠다. 착륙 자세를 갖춘 비행기가 좌우로 뒤뚱거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닿았다.
"쓱!.... 쓱~!.... 쓱~.... 쿵!"
양쪽 바퀴가 차례로 몇 번씩 활주로에 닿았다 말았다 하더니, 강한 마찰음과 함께 의자 아래에서 자갈밭 위를 구르는 듯한 거친 진동이 솟구쳐 올라왔다. 마치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안 기장은 브레이크를 쭉 밟았다. 급정거하듯 비행기가 앞으로 쏠리자 뒤늦게 강 부기장이 소리치며 조언했다.
"브레이크는 1,000 psi 이내로 밟아 주세요. 남은 유압으로 7번 정도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습니다!"
"오케이. 잘 설 수 있겠다! 성공이다."
"60노트! 30노트!"
"유 해브 컨트롤! 이제 하율이 자네가 세워!" 안기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조종을 강 부기장에게 넘겼다. 당황한 강하율 부기장이 뒤뚱거리며 비행기를 완전히 세우고 파킹 브레이크를 걸었다. 완전히 비행기가 멈추자 안기장이 긴급 방송을 했다.
"기장입니다. 승객들은 자리에 앉아 계세요. 다시 말합니다. 앉아 계세요. 리메인 시티드(Remain Seated)"
조종실 문 너머에서 환호와 박수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시큐어 체크리스트까지 마친 안기장은 강부기장과 크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곧이어 조종실 밖으로 나와 차례로 승무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정 사무장의 두 손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생일파티 못 가서 어떻게 해요?"
"지금 생일이 문제예요? 초상날 될 뻔했는데!"
안 기장이 인터폰을 들고 직접 승객들을 마주 보며 방송을 했다.
"여러분 방금 안전하게 착륙했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두꺼운 옷을 챙기시고, 모자라면 담요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승객들은 다시 한번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안기장은 더 이상 딱히 할 말이 없어 쭈뼛쭈뼛 다시 조종실로 돌아왔다.
이 시나리오는 사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도 가끔 모의비행 훈련을 한다. 반면에, 설리 기장의 허드슨강 착수는 훈련으로 대비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설사 훈련을 한다고 해도 어떻게 대응 절차를 마련해야 할지 막막하다. 상황과 변수는 매번 다르지만 시간은 촉박하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결정이 무엇이라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리의 허드슨강 비상 착수는 실제로 일어났다.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은 연습할 수 있고, 실제 일어난 상황은 연습하기 어려운, 참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러니이다.
그래서 설리 같은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그런데 영화 속 설리의 모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 속에서 설리는 침착한 정도를 넘어 덤덤하기까지 보였고, 멍 때리는 표정과 흐리멍덩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반전의 매력이 아니었다.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 격한 공감? 이런 것이었다. 영화 속 설리의 모습은 신념에 찬 얼굴로 주먹 불끈 쥐고 적진에 뛰어드는 그런 영웅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저고도에서 엔진이 모두 꺼진 끔찍한 상황에서, 설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 몇 분의 시간을 쪼개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결심하고, 계획하고, 수정했다. 표정과 말, 그리고 감정에 소비할 에너지마저도 모두 비행에 쏟았다. 자신에게 프로그램된 태스크를 자신에게 축적된 데이터를 사용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사용한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확신과 신념, 영웅다운 표정과 자태는 30년 베테랑 경력의 기장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톰 행크스의 연기는 소오름이었다. 조종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저런 모습에 빙의할 수 있었을까? 조종사로서 승객들을 살려낸 설리 기장을 무척 존경하지만, 영화 관객으로서 그를 연기해낸 톰 행크스와 연출을 이끌어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정말로 괴물이라는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