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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울퉁불퉁 뚝배기 Nov 03. 2020

보이스피싱과 시금치 무침

가사 도우미 이모님은 보이스피싱단과 통화하는 와중에 내가 시금치 무치다

난 오전에 자격증 공부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문을 닫고 영상을 보고 있는데 마루에서 중국 남자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린다. 가사 도우미 이모님도 큰 목소리로 핸드폰 스피커로 통화하고 있었다. 난 속으로 중얼중얼. “거 참, 너무 크게 통화하시네...” 난 계속 화면에 집중을 하려고 하였으나 쉽지가 않다. 통화가 길어진다. 1시간, 2시간, 3시간...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신다. 나랑 딸은 배가 고프다. 배고픈 딸을 위해 배고픈 아빠가 나선다.


난 아내한테서 배운 (유일무이한) 초간단 시금치 무침을 오랜만에 만들었다:


1. 물을 끓인다

2. 시금치 끝을 가위로 자르면서 씻는다

3. 마늘을 까서 다진다(집에 항상 다진 마늘이 없다)

4. 시금치를 다 냄비에 30초간 욱여넣는다(집 냄비가 작다)

5. 뜨거운 시금치 물을 짜고 자른다(아, 내 손이 뜨겁다)

6. 그리고 다진 마늘, 소금을 4-5번 뿌리고 참기름을 넉넉히 부은 다음 시금치와 함께 열심히 비빈다.

7. 시금치만 먹기는 썰렁하니 계란 프라이를 굽는다

(아 시금치 무침 레시피 글이 아닌데...)


부녀는 시금치와 밥을 먹고 넷플릭스를 보는데도 이모님은 여전히 통화 중이시다. 이제 딸 학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방에서 안 나오신다... 슬슬 난 부글부글 끓는 물이 되어간다. 일하러 오셔서 왜 하루 종일 전화만 붙들고 계시지...???


난 딸을 바래다주고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이모님은 아직도 전화를 붙잡고 계신다. 난 방에서 브런치 조회수를 체크하고 있는데 이모님은 통화하시면서 나한테 아래 메모지를 건네준다:

이게 뭔가... 난 좀 어이가 없어하는데 30분 후 다시 방에 들어오신다. 드디어 전화를 끊고 운을 떼신다:


이모님: “저 감옥 가게 생겼어요. 제 통장이 (대포통장)이라고 중국 대사관에서 아침에 연락 오고, 오후에는 공안(중국 경찰)이 연락 왔어요. 제가 어느 통장에 제 돈을 오늘 5시까지 안 넣으면 한국 경찰이 제 집에 와서 저를 잡아서 공안한테 넘겨서 전 중국 가서 10년 감옥 생활한데요.”


나: (아 이건 보이스피싱이다 하고 감이 왔다) “이모님, 한국 경찰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이거 사기예요. 본인도 모르게 대포 통장으로 활용되었다고 집까지 와서 잡아가지 않아요. 기껏해야 참고인으로 부르면 모를까.”


이모님: “이거 보세요. 공안이 자기 사진도 보내고 제 한국 전화기와 중국 전화번호 다 알고 있더라고요. 제 중국 신분증도 가지고 있고요. 저 보러 1급 비밀이니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해요.”


나: “그게 이상하잖아요. 제가 중국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변호사 선임해서 상의할 수 있어요. 필요하시면 제가 아는 변호사님 소개해드릴게요.”


(이모님이 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보이스피싱 낌새를 느껴서 전화를 끊었지만 그래도 반신반의하는 중에도 일당한테서 전화와 문자가 계속 온다.)


이모님: “제가 00은행, 00은행에 얼마 있다고 알려줬어요.”


나: “전화받지 마세요. 계좌번호 아직 안 알려줬으면 괜찮아요. 어차피 이모님 신분증 번호 있다고 은행에서 돈 뺄 수 있었다면 이렇게 전화 계속 안 하겠죠. 한국에서도 몇 년 전에 이런 검찰 사칭한 일당들 뉴스에도 나왔어요.”


이모님: (여전히 불안하시다) “감옥 안 가겠죠?”


나: “차라리 감옥 가시고 돈을 나중에 내시는 게 낫죠. 그리고 적어도 한국에 계시면 중국 감옥 안 가요.”


(이제 전화와 문자가 더 이상 안 온다)


이모님은 5시간 넘게 통화하셔서 그런지 여전히 진정이 인 되신다. 난 버리는 걸 까먹었던 청심원 한 알 드렸다. 진정된 후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1) 사기단은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바람에 이모님은 하루 종일 혼이 비정상이셨다


2) 이모님이 진정하고 본인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중국 주한 대사관이라는데 찍힌 번호는 국제 전화번호였다 (...)


3) 이모님이 다시 사기단이 보낸 자신의 신분증 사진을 보니 복붙이었다(그래도 여전히 미스터리가 있다. 어떻게 이들은 이모님 신분증 번호를 확보했을까)


4) 이들은 치밀했다. 이모님 전화기 배터리 방전되지 말라고 친절하게 충전기를 꼽으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모님은 한국에 오셔서 힘들게 버신 돈을 한방에 날릴 뻔한 날이었고 나는 오랜만에 시금치 무침을 만든 하루였다.


이모님의 BTS 따님에 대한 글:

https://brunch.co.kr/@jitae20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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