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가 일하는 카페로 갑자기 찾아왔다.
자기가 그동안 말해 왔던 오가닉 음식들을 만들건대
오늘 내 시간이 괜찮은지 굳이 직접 와서 물어봤다.
그 성의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어 알겠다고 했다.
약속 시간이 애매해 비록 운동 끝나고 노메이컵일 테지만 뭐 어때?
피터의 동안 비결은 바로 철저한 몸 관리와 식단 조절이라 말했다.
그래서 매번 대화 주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본인의 유기농 요리에 대한 것이다.
얼마나 건강한 재료를 이용하는지,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는지, 그 맛에 대한 표현이 아주 기가 막히다.
나도 농담 삼아 좀 해달랬더니 진짜 초대를 해준 것이다.
호주에서 친하게 지냈던 백인 친구 레이스만 봐도 맨발로 주방을 휘젓고
그 발로 캐러반을 들어가는 모습에 조금은 경악스러웠고,
한국에 놀러 왔을 때도 잘 씻지도 않고 지내는 모습을 봐와서 일반화의 오류 일 수 있지만
거의 백인 외국인들은 꽤나 덜렁대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피터는 완전 정반대였다. 남자가 이렇게 집에서도 각 잡고 사는 건 처음 봤다.
화장실을 갔더니 주변에 물기 하나 없어서 손 씻고 나오는데 휴지로 물기를 닦고 나올 정도로 하얗고 깨끗했다. 심지어 실내화도 사이즈별로 구비되어 있었고 거실에는 필요한 물품들과 장식품 몇 개가 굉장히 심플하고 군더더기 없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깔끔함이 정말 인상 깊었다.
피터는 내가 들어가자마자 엄청나게 큰 티브이와 원하는 색깔로 바꿀 수 있고
클럽에서만 볼 수 있을 만한 조명을 자랑부터 했다.
생각해보니 피터는 돌싱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키도 크고 잘생기고 돈도 많은데 여자들이 과연 내버려 뒀을까?
아니 어쩌면 이런 주름 없는 침대보를 가지고 있는 성격에 오히려 결혼을 못 한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깔끔한 곳에 내 지저분한 운동 가방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고 피터는 아무 데나 놓으라 했지만 왠지 구석탱이에 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대충 던져놓았다.
피터가 오늘 저녁 메뉴는 닭 바비큐와 샐러드라고 했다. 베란다에서 작은 화로에 포일을 싼 양념한 닭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 샐러드는 병아리콩으로 만든 샐러드였는데 모든 것이 유기농이고 살이 찌지 않게 드레싱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진짜 맛있었다. 맛있게 건강한 맛. 내가 좋아하는 음식 스타일이었다.
운동을 마치고 난 후이다 보니 내가 피터보다 많이 먹었다. 피터는 확실히 소식을 하는 거 같았다.
자기 관리의 끝판왕이었다.
피터랑 대화하다 보면 영어 때문에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피터가 어느 정도는 영어를 못하는 나를 이해해주지만 이게 반복되면 나 같아도 대화하다 기운 빠질 거 같다.
안 그래도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어려움이 많은데 한 번은 우리나라 대통령 탄핵이 주제로 나와서 당황했다. 아직도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날 정도로 짧게 말하긴 했다..
이 날도 어느 때처럼 못 알아들었지만 그냥 웃어넘겨 버렸더니 이번엔 대뜸 너 무슨 말 한지 알고 웃는 거냐 되물어보는 게 아닌가? 순간 얼굴이 빨개지고 너무 민망은 한데 말은 해야겠어서 대충 말했더니 헛소리였나 보다.
“ 티파, 너 완전 딴소리하고 있어, 잘 못 알아들었으면 다시 물어봐도 돼”
그날 집에 가서 이불 킥을 얼마나 해댔나!
그렇게 먹으니 슬슬 갈 시간이 되었다. 또다시 과식을 해버린 바람에 후회하며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피터가 백허그를 하는 게 아닌가?
What the!!!
신경질적인 소리와 동시에 로봇처럼 빠져나왔다.
피터는 내 반응이 너무 웃기다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일단 서둘러 집으로 가겠다고 하고 나왔는데 사실 엄청 놀랬다.
장난이라 할지라도 동양인 여자를 우습게 본다거나 하는 인상을 심어주면 안 되기 때문에
지조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내가 쓸데없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각 잡힌 침대와 물기 없는 화장실이 생각나니 이상하게 더 무서웠다.
집에 가는 길에 피터가 잘 가고 있는지 전화가 왔다. 혹시 내가 오늘 데려다줘야 했냐고 묻길래 그럴 필요 없다, 괜찮다 했다. 굳이 그걸 물어보러 전화를 하나, 혹시 피터가 날 좋아하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