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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또 Oct 30. 2020

2년 가까이 카라반에서의
시골 생활

운이 좋게도 지인이 호주에서 워홀 중이었다. 

시티 생활보다 시골생활을 선호한다면 기꺼이 그곳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시티 생활이 아무래도 편했겠지만, 어쩌면 한적하고 여유로이 흘러갈 수 있는 곳이 

지금의 나에겐 더 필요한 환경이지 않을까 해서 바로 오케이를 했다.


이미 여기서 생활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이제 시작하는 나에게 부럽다며 지금 이때가 그리워질 거라 

호언장담했다. 초반에 적응하기 바빠서 와 닿지 않았고 괜히 그럴 리 없다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결국 너무나 그 예언대로 적중해버려 참으로 멋쩍은 순간이었다.


선배들이 하는 말이나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는 말들은 어째서 나이 먹을수록 공감이 가는지 모르겠다. 

후배들에게 조언 같은 말을 해도 잔소리 같을 뿐 듣는 사람도 없을 걸 안다. 

각자 개성과 고집도 있고 또 그래야 젊음 아니겠는가.


어쩌다 나이 어린 친구들에게 진지한 충고를 할 때면 그저 참고만 하고 10년 후에 이런 대화를 했다는 것만 

기억해달라고 말한다. 내 말대로 해도 미련 남고 안 해도 미련 남을 테니 그냥 본인 결정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

선을 다하라고. 남의 말 잘 안 듣는 우리 모두 청개구리니까!


사실 이런 생활이 그립다면 거짓말인 것처럼 그곳의 환경은 엄청 열악했다. 

사과 농장에 있었던 내내 캐라반에서만 살았는데 그 캐라반은 한 평반 남짓한 아주 작은 공간이었고 

화장실과 샤워실도 1분 가까이 걸어가야 했다. 

공동 주방이 있었고 그조차 오픈형이어서 겨울에는 패딩을 입고 불편하게 요리해야 했다.

가끔 늦은 밤에 야생 웜벳이 돌아다니다 벽을 긁어대 깜짝 놀란 적도 꽤 있고 산책 중엔 야생 여우를 볼 정도로 깊은 산골 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장을 보러 갈려면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고, 초반에 차가 없었던 나는 

주변 사람들이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언제 또 갈지 모르니 일단 따라가고 봤다. 

괜히 날 기다리게 되는 일이 생길 까 봐 천천히 구경도 못하고 항상 먼저 장보기를 끝냈으며,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당연히 가자고 말하지 못했다. 

식수를 비롯한 모든 물은 빗물을 받아서 샤워 및 세탁을 해결했는데 나는 이게 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비가 안 오면 물도 안 나왔다.


사실 1년 반을 그런 곳에 있었으니 예전에는 지저분한 것도 못 참고 극도로 예민했지만 

지금은 어떤 환경이든 웬만하면 다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처음 며칠은 도시생활과 굉장히 동 떨어지는 이 생활을 청산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어쩌다 보니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지나버려서 이 불편한 환경에 완전히 적응해버렸고 

모순적이게도 지금은 가장 소중한 경험이자 추억이 되었다.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 하면 뭐하러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지만,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니 상관없었다.


반대로 깨끗하고 편의시설이 다 갖추어진 숙소였어도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내가 다시 이렇게 자연에 둘러싸인 푸른 곳에 오래 머물 수 있을까?

불만스럽게 지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나만 괴롭히는 일이니 자연스레 편하게 내려놓는 방법을 

터득한 거 같았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그때가 좋았지라며 회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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