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할머니 집에 들어가게 된 사연
한국에서 독일로 오며 한 달 동안을 살 숙소만 구해놓은 상황이었다. 가서 부딪히며 집을 구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출국을 했다. 독일에서 집을 구하려면 집주인과 면접을 보아야 한다는 둥, 외국인은 집을 구하기 쉽지 않다는 둥, 여러 가지 소문을 익히 알았던 터라 첫 한 달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매일같이 인터넷을 뒤적거리고 핸드폰을 만지며 어떤 집을 구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떤 집에 살지 고민을 하며 우리는 나름대로 기준을 세웠다.
첫째, 시내에서 가까울 것.
첫 숙소도 시내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라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쇼핑을 하게 된다면 시내에서 시간을 많이 보낼 텐데 매번 2-3 유로를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학원을 다니게 된다면 시내에 다녀야 할 텐데 그때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면 나는 아마 학원을 거의 빠질 것이 확실했다.
둘째, 사람이 적당히 북적북적할 것.
첫 숙소는 가족들이 주로 모여사는 조용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이웃들이 서로 알고 지내고 친절하지만, 너무 조용한 것이 문제였다. 창문을 열고 보이는 거리가 너무 조용한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매일 듣는 새소리는 하루 이틀은 좋았지만,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나에게는 너무 적막한 것 같아 이렇게 매일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도시 여자"라고 지칭하며, 아무래도 나는 사람이 조금 북적거리는 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주말에 남편과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며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주지역을 가로질러 갔다. 그 동네를 가로지르며 남편에게 "오빠- 나 딱 이런 곳에 살고 싶어."라고 말했다. 시내와는 멀지 않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 적당한 자연과 적당한 도시가 완벽한 조합을 이루는 곳. 바로 이 곳에 딱 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집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딱 두 번 뵌 집사님이었는데 마침 우리가 집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계셨다. 집사님의 직장 동료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집이 비는데, 감사하게도 우리를 소개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집주인의 연락처를 받고 당장 그 주에 집을 구경하러 갔다.
집은 빛이 잘 들어오고 깨끗했다. 할머니가 사셨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주방과 화장실, 가구들이 완비된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캐리어 두 개만 가지고 독일에 온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지나가며 살고 싶다고 말했던 그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당장에 그 집을 계약하고, 키를 받고, 집 청소를 하며 우리가 살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조건을 갖춘 집이 갑자기 혜성처럼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가 이 곳에 살고 있다. 그렇게 어려울 줄 알았던 모든 과정이 단 한큐에 끝나버렸다. 우리도 이렇게 쉽게 집을 구하게 된 것에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에게 여러모로 완벽한 집이었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할머니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 문 앞에는 "경찰 수사 중"이라는 딱지가 여전히 붙어있는 상태였고, 어지럽게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사실 별거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되는데, 무언가 내 마음속 한 구석에는 어쩐지 꺼림칙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 집에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을 지워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청소를 하다가 할머니 물건이 나오면 재깍재깍 상자에 담아서 지하실 창고에 두고, 할머니가 사용했던 비누나 샴푸 등의 물건들을 모조리 정리했다. 우연히 침대 밑에서 할머니 머리카락으로 추정되는 금발 머리카락이 발견되면,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되는 양 장갑을 끼고 청소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할머니의 사진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는 서랍 깊은 곳에서 발견된 할머니의 지갑.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이는 지갑. 그 안에는 할머니의 이름이 적힌 종이와 증명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꼬깃꼬깃 접힌 흔적이 있었던 아들의 어릴 적 사진도 함께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데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남긴 손 글씨를 엄마가 지갑 구석에 넣어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는 그 쪽지를 오랫동안 감히 꺼내지 않았다. 우리 엄마가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지갑 깊숙이 간직했던 것처럼, 할머니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토록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할머니 또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어머니 었고, 이 집 또한 그분에 대한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어버이 날에 집주인 아저씨가 가만가만 생각하는 공간이고, 만약 손자들이 있다면 할머니의 음식을 생각하며 우리 집 주방을 떠올리는 공간이겠구나- 생각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이 집에 정을 붙이게 된 것이. 구석구석 만지고 싶지 않았던 공간도 애정을 담고 청소하게 되고, 내 집처럼 깨끗하고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 집에서 할머니가 했던 요리와 다른 식탁이 차려지고, 피부색과 눈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이 집을 방문하겠지만 여전히 이 집을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공간으로 유지하고 싶다. 할머니의 공간을 오래도록 지켜드리고 싶다.
이 집과의 인연을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다.
집과 우리의 묘한 인연. 이 집에서 있을 우리의 일들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