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가는 Jun 28. 2019

노인이 살기 좋은 나라

독일의 예쁜 구석 찾아주기 


얼마 전 학원에 가는 길, 바람이 솔솔 불고 기분이 좋아질락 말락 하는데 내 안에 불쑥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어봐. 나 지금 기분 좋아도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등과 동시에 흥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불쌍하고 가엾은 말도 못 하는 나" 모드로 돌아가서 쭈굴쭈굴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독일에 대해서 좋은 점이 생길 때마다 내 안에 그것에 대해서 저항하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참 재밌는 존재여서 나 스스로를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나에게 동정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지만 또 관심은 받고 싶어 한다. 어쩌면 나도 연약한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를 하면서 스스로를 자꾸 불행하게 만들진 않았을까?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독일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단편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 할머니를 좋아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있는 지혜를 듣는 것도 좋고,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더 생생한 역사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한다. 역사책에 나오는 역사가 아니라 한 개인이 겪고 느낀 이야기가 나한텐 더 와 닿는다. 그래서인지 이 곳에 와서도 유독 할아버지 할머니를 주의 깊게 보게 된다.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혼자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할머니를 봤다. 노란 윗옷에 베이지색 바지,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작은 핸드백을 손목에 걸치고 구부정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할머니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잎 베어 먹을 때의 그 표정에는 남들에 대한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지금 내 손에 있는 아이스크림에 온전하게 집중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맛에 대한 탐닉하는 표정. 가능하다면 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할머니는 알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는지. 


독일에는 유독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다. 아니 어쩌면 밖에서 만날 수 있는 노인인구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평일 오전에 카페나 백화점에 가면 거의 80% 이상이 할아버지 할머니다. 그들은 커피를 시켜놓고 신문을 읽거나, 쇼핑센터를 구석구석 정독하며 물건을 산다. 한 손엔 지팡이, 한 손엔 친구들의 손을 잡고 천천히 시내를 걷기도 한다. 


그에 비해 한국의 노인들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국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TV를 보며 지낸다. 그것이 아니면 등산을 다니시거나, 노인정에 앉아 계시거나, 아니면 소일거리를 하시느라 나물을 캐서 시장에 팔고 폐지를 주으신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쇼핑센터나 카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발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 같다. 문화별로 '즐기는 삶'에 대한 자세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문화생활에 대한 사회적인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빠 엄마는 우리와 새로운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가면 늘 주위를 둘러보시고 작게 속삭이셨다.

"여기서 내가 나이가 젤 많아 보여." 

"여기서 내가 머리 젤 하얀 것 같아." 

막상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데 본인들께서 그렇게 주변을 신경 쓰시며 내가 이 곳에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를 계속 저울질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엄마 아빠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곳은 젊은 사람들을 위한 장소예요.라는 사회적인 암묵의 압박을 느끼시고 주위를 의식하신 것 아닐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노인들은 점점 더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이 곳은 참 노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이다. 노인에 대한 사회의 장벽이 거의 없다고 느껴진다. 노인들이 카운터에서 버벅거리거나 천천히 여러 질문을 할 때에도 점원들은 짜증 내는 기색 없이 하염없이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그리고 거리의 할머니들은 굽은 등, 지팡이를 집고 있어도 자기 나름대로의 멋을 화사하게 한껏 내고 다닌다. (그래도 밝은 색 옷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할머니들의 특징인가 보다.) 할아버지들은 더운 여름에도 베이지색 양복에 베레모를 쓰고 마트에 장을 보러 오신다. 

우리 집 근처에는 리조트 같은 예쁜 건물이 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이 고급 아파트인 줄 알고, 집을 구할 때 저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호텔이 아니라 양로원이었다. 앞 뜰에는 예쁜 정원이 있고, 주차건물도 넉넉해서 저런 곳이면 나도 그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내 가까운 곳에 그리고 너무 예쁜 모습으로 있는 양로원을 보며 이것이 아마 독일에서 받아들이는 노인인구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주변의 신경을 쓰지 않고 길가에 서서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할짝 하락 먹는 할머니가 나는 참 멋져 보였다.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든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솔직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점점 더 기성세대가 되어가며 사회의 암묵적인 틀을 깨고, 누군가가 있어야 할 자리를 규정하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들을 더 깨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집과의 긴밀한 인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