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연히 만난 할머니
조기퇴근을 한 어느 날 농협에서 한 할머니를 마주쳤다. 한 손에는 보행기, 한 손에는 뭉텅이의 서류를 들고 천천히 걸으신다. 남루한 점퍼, 살짝 떨리는 손, 할머니의 주름진 턱 위에 걸린 마스크, 남은 머리카락도 한 줌이다. 할머니와 반대로 걸음이 빠른 나는 잰걸음으로 들어와 너무나도 익숙하게 대기표를 뽑고 자리에 앉아 기다린다. 회사에서 보내는 8시간을 바쁘게 보내고 나면 경제적으로는 윤택할지 모르겠지만 감성이 피폐해진다.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한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 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두리번거리는 척하며 할머니를 계속 살핀다. 설 연휴 전이라 손자들에게 줄 세뱃돈을 뽑으러 오신 걸까- 대기표 뽑는 방법은 알고 계실까- 알아서 잘 하실걸 알면서도 나의 오지랖이 발동해 자꾸 마음이 쓰인다. 우리 할머니와 오버랩되면 순간 울컥해진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 전부를 주는 일이었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재능과 마음을 다해 그들에게 나를 흠뻑 쏟아주고 싶었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무슨 일을 하는지가 만만찮게 중요함을 실감한다. 과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삶인 것일까?
이제 기성세대가 된 나는 이 사회와 구성원에게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내 존재를 던져줄 수 있을까- 이성과 열정기 골고루 공존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서른을 앞두고 내가 하는 고민이다.
오늘 내가 만난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다시 한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지, 무엇이 내 눈시울을 붉히는지- 내가 공부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