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episode 05
5. 목판 흉터 위의 학습 전지
혜진이 서울에서 살게 된 뒤로 단 하나 좋았던 점이 있다면,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지루한 엄마의 잠보다 견디기 힘든 건 삐걱거리는 경첩처럼 요란하게 부딪치는 부모의 다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다정한 척하다가도 금세 폭력적으로 돌변했고, 무던한 척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가끔 충동적으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고,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날이면 꼭 자식들을 깨우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어떤 가족도 취한 가장을 반기지 않았다.
문고리가 돌아가며 터지는 소리와 엄마의 고함, 집 안에 갑자기 울려 퍼지는 분노의 소리는 곧 아버지가 귀가했다는 신호였다. 어린 혜진은 그 소리에 늘 긴장했고, 자신의 방 문을 굳게 걸어 잠그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을 견뎌야 했다. 집 안에서는 현관 너머 인기척에도 마음을 졸였고, 귀갓길에는 대문 안의 분위기를 짐작하며 조심스레 걸었다. 그 어스름한 귀갓길의 공기를 지나 대문에 다다랐을 때, 두 번 중 한 번은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혜진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놀이터 주변을 그저 빙글빙글 돌았다. 쇠사슬 그네의 차가운 감촉, 비린 금속 냄새는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혜진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았다.
부모의 일관되지 않은 태도와 예측 불가능한 분노는 혜진에게 끊임없는 불안을 남겼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문이 열리는 듯한 환청에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아버지가 아니라 옆집 방문의 소리임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그녀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혜진은 아버지의 폭력을 목격한 첫 날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그 일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부모가 왜 싸우는지도 모를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날의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남았다. 어쩌면 아버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첫 장면일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말없이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돈을 잃었다. 곧이어 부모 사이에는 격한 말다툼이 오갔고, 결국 엄마는 "꼴도 보기 싫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아버지는 그 문을 닫는 행위 자체를 가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자기 가족이 문 너머로 도망친 것에 분노한 그는 방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네가 뭔데. 내 집에서 문을 잠가! 이래도 안 나와. 이래도?”
"얘들 있잖아. 미쳤어?!"
엄마는 언니와 혜진, 갓 태어난 동생을 품에 안고 이렇게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거인같이 크던 아버지의 발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작은 방을 울렸다. 한 번 두 번, 점점 더 커졌다.
뻥--! 그날 그 작은 방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문에는 아버지가 발로 차서 생긴 커다란 구멍이 났다.
엄마는 억척스러울 만큼 알뜰한 사람이었다. 다섯 식구의 살림을 남편의 수입으로, 아니 때로는 그의 무모한 투기까지 감당하며 꾸려가기 위해, 스스로에게는 옷 한 벌, 가방 하나도 잘 사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자녀의 교육만큼은 절대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문을 부순 다음 날, 엄마는 새 문을 들이는 대신 7세 아동용 한자 학습 전지를 구멍 위에 덧대 붙였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파손된 나뭇결이 훤히 보였지만, 바깥에서는 그 전지 속 한자들이 흉터를 덮고 있었다.
어린 혜진은 암기를 잘했다. 엄마는 그런 혜진을 종종 앉혀 두고선, 거실 이곳저곳에 붙여둔 한자와 영어 단어들을 보며 퀴즈를 냈다.
"이건 뭐지?"
"뫼 산."
"잘했어. 이건 뭘까?"
"내 천"
어린 혜진은 자랑스럽게 뜻을 맞혀 나가면서도, 동시에 교육 전지 너머 찢어진 문틈을 떠올렸다. 엄마가 퀴즈를 낼 때마다, 혜진은 엄마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날, 아직 기억하지? 아버지가 방문을 찼던 날. 우리는 그날을 잊으면 안 돼.’
그날의 기억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용히 벽에 덧씌워졌고, 혜진은 그렇게 한자와 영어를 공부하며 아버지의 폭력을 함께 암기해 나가는 아이로 자랐다. 엄마의 절약 정신은 어린 혜진에게 지식을 남겼고, 동시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 하나도 함께 새겨주었다.
그럼에도 혜진이 이 문 안에서 살아가는 건, 아버지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흉터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 그 하나였다. 비록 목판 흉터 안에서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피부와 살결은 안전 지대에 있다는 그 믿음 하나를 먹고 어린 혜진은 자라났다.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 (작품 제목은 추후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목판 흉터 위의 학습 전지’를 집필하면서, 〈모순〉 속 슬픈 일몰의 아버지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