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한 그루의 나무에게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2부 수관의 수줍음] episode 01

by 지은
2부
수관의 수줍음

자연은 치열하다.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먹이를 독차지한다.
그러나 나무는 다르다. 각자의 거리를 두고, 햇빛을 나누어 쐰다.
처음 나무의 삶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의 삶에 그것보다 더 완벽한 삶의 방식은 없을 것이라고.



1. 한 그루의 나무에게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그 겨울, 강현과 나 사이에는 전에 없던 낯선 공기가 흘렀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집으로 왔다. 집에 왔을 때, 부엌에서 고개를 내민 큰 언니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 년 간 짝사랑하던 남자애에게 차이고 오는 길이야. 아 차인 건 아니었던가. 어쨌거나 망했어.’ 그렇게 구구절절하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우리 세 자매의 막내 딸, 세진이다. 여수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전교 2등으로 졸업한 나는,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며 가족과 교내의 자랑이 되었다. 지방 의과대학에 진학한 전교 1등 대신 내가 더 관심을 받은 건, 아마 대학교 앞에 붙은 ‘서울’ 타이틀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국의 고등학교는 서울대학교를 몇 명 보냈는가로 관심이 집중되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 이름 하나에, 엄마는 신나게 짐을 싸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에 먼저 올라간 언니들은 각자의 자취방을 정리하고 새로 구한 서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 이름 하나에, 뿔뿔이 흩어졌던 우리 집 여자들이 다시 뭉쳤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잘한 일인지 묻는다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


정확히 5년 전, 스무 살이 되던 해 2월에 나는 엄마가 운전하는 중고 QM6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마구잡이로 쌓아 올린 이삿짐 상자들이 불규칙적으로 부딪혔고, 나는 그것들이 일순간 쏟아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귀로 듣고, 불규칙한 진동을 손끝으로 느끼며, 그렇게 서울로 향했다. 아마 그때 마음속으로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루한 필수 교과목을 우수하게 졸업했으니, 이제 내 마음을 더 뛰게 할 무언가가 펼쳐질 거라고.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기대의 첫걸음이었던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남은 기억은 별로 없다. 자기소개. 게임. 또 자기소개. 술. 게임. 술. 술. 술… 그래. 스무 살은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이 보여주는 것이 많지만, 그 대부분은 지루하다는 사실만을 깨닫는 나이였다. 하나 둘 조금씩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모두 지루한 기억들의 연속이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큰 대강당에 둘러앉아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점심을 먹고 다시 강당으로 집합했을 때엔, 설치된 동아리 부스에서 나누어 주는 수많은 입부 홍보 전단지가 저마다의 품 안에 쌓였다. 그토록 무수한 정보가 낯설게 쏟아지던 강당에서,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동기 누군가의 손에 끌려 어느 부스에 들렀을 때, 거기에 강현이 있었다.


강현은 ‘수관학회’ 홍보 부스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다른 부스처럼 사탕이나 과자를 나누어 주거나, 꽹과리나 징 따위로 요란 차게 소리 내거나, 입회 명단에 이름을 쓰면 선물을 준다는 말도 없었다. 푸른색 보자기를 주름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깔아 둔 테이블 위에는, A4 포스터 3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식물, 뿌리로 의사소통도 합니다. 사람보다 더 말 잘해요.’

‘식물, 다른 나무에게 영양분도 나눠줍니다. 사람보다 더 착해요.’

‘식물, 곰팡이, 바이러스랑 긴 공생 관계도 맺습니다. 사람보다 의리 있어요.’

그 포스터에는 학회 오리엔테이션 일자나, 입부 시 얻게 되는 어설픈 혜택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되어 있었다. 식물, 사람보다. 식물, 사람보다. 식물, 사람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기는 다른 부스로 옮겨가고 없었다. 다시 포스터 속 문구에 시선을 옮기다가, 나는 옆에 놓인 입부 희망서에 이름, 학과, 학번, 전화번호를 적었다.


학회 오리엔테이션에서 다시 만난 강현은, 예상했던 대로 ‘수관학회’의 회장이었다. 과학고를 졸업하고 1년 일찍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갑 친구이면서도 학과 선배이자 학회장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수관학회’는 식물과 생명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며, 이를 우리의 삶과 연결해 성찰하는 학회였다.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강현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식물을 연구하는 것을 넘어, 성장과 공존, 기다림과 연결 같은 삶의 원리를 식물에게서 배우는 학회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그 오리엔테이션 장에서 새로운 입부원들을 앉혀두고, 강현은 이렇게 말했다. “식물에는 삶이 있어. 우리는 식물에서 삶을 배워야 해.” 그러나 그 말을 시작으로, 그 지루해 보이는 소학회에 졸업할 때까지 참여한 건 우리 학년 중에 나 하나였다.


대학 시절 내내, 나는 강현에게 푹 빠져 있었다. 아니. 식물을 함께 들여다보는 일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강현이 가져온 주제는 항상 흥미로웠다.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10명 남짓 되는 그 작은 부원 중에서 나만 흥미를 느꼈다. 그 고요한 학회 시간 속에서, 질문하고, 이야기하고, 답을 찾는 건 열이면 아홉은 나의 차지였으니까. 나머지 부원들은 그 시간을 밀린 전공 수업 과제를 하는 시간쯤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학회 내용을 받아 적는다는 핑계로 노트북을 타닥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거기 있는 모두가 과제를 하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 나도 강현도. 그러나 강현은 언제나 굴하지 않고, 오직 나만이 흥미로워할 주제를 알려주었다.

“오늘은 생명의 성장 과정을 볼 거야. 식물이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함께 관찰해 보자.”
“그럼, 우리가 직접 식물의 탄생을 기록하는 거야?”
“맞아. 그리고 그걸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도 같이 생각해 보자.”

나는 노트를 들고 열심히 필기하며 물었다.
“그러면 우리가 식물의 탄생에서 배우는 건 정확히 어떤 거야?”
강현은 꼿꼿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며, 길고 깊은 눈동자로 내 질문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사람보다 식물이 더 잘 보여주는 것들이 있어. 성장, 공존, 그리고 때로는 기다림. 그걸 마음에 새기는 거지.”

내가 강현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진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머리를 고뇌이고 있으면, 강현은 잠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 생각은 어때, 세진? 식물의 기다림과 우리 삶, 연결할 수 있겠어?” 강현은 언제나 내 의견을 물었다. 꼿꼿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던 눈동자는 길고 깊었다. 내 생각을 꿰뚫는 듯했다. 그럼 나는 또다시 의욕이 넘쳤다. 아니. 의욕이 넘치는 체를 했다. “응.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이 소학회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 글쎄. 지금 와서 왜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을까 생각해 보면 첫 번째 답은 이렇다. 아마도 나는 그 대화 후면, 자연의 섭리처럼 내 세상의 올바른 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두 번째 답은 이렇다. 그래. 다른 이유는 다 필요 없었다. 나는 그저 강현이 좋았다. 강현은 나무 같았다. 땅을 깊이 파고든 뿌리처럼 올곧았고, 한 치 흔들림 없는 줄기처럼 반듯했다. 식물에 관해서라면, 모든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한 그루의 나무에게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꼬박 오 년의 계절이 흘렀다.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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