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우리의 삶은 닿고, 얽히고, 겹쳐서

[2부 수관의 수줍음] episode 10

by 지은

10. 우리의 삶은 닿고, 얽히고, 겹쳐서


그 일이 있은 지도 몇 주가 지났다. 어느새 더위가 고개를 드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우리 네 여자는 짧은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형부가 회사 이벤트에 당첨되어 강원도의 신상 리조트 숙박권을 받아온 것이다. 비록 엄마가 꿈꾸던 크루즈 여행은 아니었지만, 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마는 신이 났다.

나는 바쁜 언니들에게 돈을 받아 들고, 캐리어를 사기 위해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나왔다. 엄마는 오랜만의 쇼핑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나는 그저 옆에서 천천히 고르라고 말하며 그녀의 꽁무니를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때였다. 들뜬 엄마의 어깨너머로, 지나치듯 멀어지는 강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급하게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나 친구를 만나서. 잠깐만 여기에 있어?"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달려 나갔다.


“강현!”

그가 놀란 기색으로 날 돌아봤다.

“뭐야. 세진아?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게. 잘 지냈어?"

“그럭저럭. 회사 때문에 정신없지 뭐. 넌 어때?"

"나도 요즘 취업 준비하고 있어. 너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강현이 웃었다.

"좋네. 오랜만에 네 얼굴 보니 정말 좋다."

"나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오랜만에 만난 강현은 조금 말라 있었지만, 오히려 더 또렷해진 얼굴선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 모습을 보자, 지난 몇 주 동안 마음속에서 묻어두었던 질문이 불쑥 올라왔다.

“있잖아. 강현. 너 숲에 가본 적 있어?”

강현은 여전히 같은 질문에 빠져 있냐는 듯이 미소 지었다.

“수관의 수줍음 얘기하는 거야?”

"그래. 맞아.”

“말레이시아 셀랑고르 주 케풍의 삼림 연구소에서 실제로 봤지.”

“그런 거 말고. 우리 주변, 그냥 평범한 숲에서 나무가 거리 두는 모습을 본 적 있어?”

“평범한 숲?”

강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냥 동네 숲 말하는 거야. 보통 나무들은 가지가 서로 닿아 있잖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말이야.”

그 말에 강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더 이상 강현의 침묵이 겁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강현이 말했다.

“그런 건 연구의 가치가 없으니까.”

강현의 말에 나는 기억 속 숲들을 떠올렸다. 무거운 대지를 뚫고 뿌리를 내린 나무줄기들과, 저마다의 방향으로 뻗은 나무 가지들, 몇 개인지 가늠도 할 수 없는 몇천 억 개의 나뭇잎들을 떠올렸다. 나의 발이 닿았던 그 대지에는, 생명을 다한 가지와 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는, 또 다른 식물이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으리라. 아. 그건 가치가 없다는 말로 치부되기 어려울 정도로 장엄한 공간이었다.

나는 말했다.

“연구의 가치가 없다는 건 평범하다는 뜻일 거야. 그렇다면, 그게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그 말에 강현은 한동안 대꾸하지 않고,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 시선이 예전보다 오래 머무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쯤,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진아. 그럼 평범한 숲은 왜 다른지 알아?”

“왜?”

“나무가 서로 닿을 만큼 높이가 같지 않거든.”

“아...”

“말레이시아의 나무들은 신기하게도 거의 높이가 일정했어. 그래서 거리 두기가 가능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 말처럼, 보통 숲은 다르지. 높은 참나무와 낮은 단풍나무가 공존하는 게 우리의 삶이거든.”


그 순간, 나는 책에서도, 숲에서도, 심지어 강현에게서도 배우지 못한 교훈 하나를 얻었다.

나는 기억 속 수관의 수줍음을 떠올렸다.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둔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땅에 스며드는 모습은, 다르게 보면 서로 닿지 못한 채 비켜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달랐다. 서로 다른 높이로 자라난 나무들과, 각자 다른 그림자와 싸우며 뒤엉킨 뿌리들, 그 엉킴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가지들까지. 아. 우리는 그 모든 숲에서 부딪히고, 얽히며, 또 설켜 있었다.


나는 강현이 알려준 수관의 수줍음이란 단어를 곱씹다 말했다.

“생각해 보니, ‘수줍음’이라는 이름 때문에, 나무들이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

“그렇지? 마치 서로 닿지 않으려 결심한 것처럼.”

“그래. 현실은 그저 흔들리고, 부러지고… 그저 나무들 사이의 틈일 뿐인데.”

“맞아.”

“저 이름 붙인 사람도 우리처럼 의미를 부여했나 봐. ‘수관학회’ 멤버로 영입해도 되겠어.”

“하하, 그러게.”


강현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강현이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있던가 생각하다가, 나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너 처음부터 이 답을 알고 있었구나?”

강현도 눈빛으로 나의 눈치를 읽은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넌 꼭 두 눈으로 봐야만 믿잖아.”

“그랬던가.”

우리는 함께 킬킬 웃었다. 백화점 복도의 소음 속에서도 우리의 낮은 웃음은 잔잔히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갑자기 내 세계가 우리 둘에서 이 세상 전체로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 강현과 나, 둘만의 대화에 머물던 내 모든 오감이 활짝 열리며, 이 공간 전체를 끌어안듯이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저 멀리, 엄마의 늙은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젊은 우리 둘의 웃음소리를 듣고선 돌아보는 늙은 이의 굳은 살결에, 옅은 미소가 차오르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백화점 오 층 난간에 기대 있었다. 둔탁한 플라스틱 난간이 내 팔로 느껴졌을 때, 나는 그 아래 일 층의 공간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람들이 북적북적하게 섞인 백화점 일 층의 팝업스토어가 작은 마을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내려다본 마을처럼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 안에서는 모두가 어떤 지점에서 멈춰 있거나, 또 다음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내 귓가에는 수다를 떠는 잔잔함과, 누군가 부딪치는 둔탁함이, 물건을 팔려는 자의 날카로운 외침과, 이벤트에 당첨된 자의 탄성의 소리가 교차하며 들려왔다. 이 공간에서 모든 생명은 각자의 감정을 안고 흘러가고 있었다. 작은 부스를 가득 메운 감정들은 겹겹이 섞여, 공중으로 넘쳐흐르듯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히고, 얽히고, 또 조금씩 스치며 살아간다. 그 교차의 순간마다 우리는 아주 조금씩 서로의 삶을 마주한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렇게 또 하나를 더 마주할 때마다 내게 찾아오는 마음이 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감히 이해하려는 용기.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사랑을 기다릴 희망.

나를 지켜주는 작은 것들에 한동안 머무는 감사.

그 모든 것이, 새 물결처럼 내 안으로 흘러든다.


그래. 삶은 언제나 완벽하지 않지만, 얽히고 부딪히는 그 모든 흔적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답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각자가 세운 단단한 벽을 허물고, 최선을 다해 다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다정함마저 틀린 답일지라도, 또 다른 옳은 답을 찾을 때까지.




2부〈수관의 수줍음〉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부〈해묘 군락〉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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