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울타리 안에 있으면 좋은 것들

[2부 수관의 수줍음] episode 09

by 지은

9. 울타리 안에 있으면 좋은 것들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닫았던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방문을 열어도 흘러들어오는 소리는 없었다. 거실은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언니는 한참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았고, 엄마는 어느샌가 깊은 잠에 빠져 들어 있었다. 나는 언니의 방 문 앞에 서서, 이 문을 연 게 언제였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생각처럼 문고리도 굳어 있었다. 힘을 주자 문고리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색하게 돌아갔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는 언니의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언니의 낯선 얼굴 위로 눈물이 얼룩지듯 번져 있었다.

나는 침대의 한편에 앉았다. 그래도 언니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언니 괜찮아? 엄마가 다단계라니. 나도 미처 몰랐지... 놀랐겠다."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고 나서야, 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와 시선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야. 세진아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언니 혼자 안 내버려 두어서 고마워…”

“아니야 언니 나는…"

언제나 무수한 질문을 쏟아내던 언니가 귀찮고 원망스러웠는데, 언니는 자신이 더 묻지 않은 것으로 스스로를 탓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내게는 그렇게 낯설고도 어색한 일처럼 느껴졌다. 삶에 처음부터 틀린 공식을 적용한 상태로, 수 겹의 시간을 살아왔다는 사실만큼이나 무서운 건 없었다.

그런 내게 언니는 오늘도 물었다.

“너는 언니한테 말 안 한 거 없지?”

“응…”

그토록 도망치고 싶던 언니의 물음이 들려왔는데도, 나는 언니가 여전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심 언니가 입을 닫을까 봐 두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가 표현을 안 하면, 가족들이 너를 배려하고 이해할 기회를 뺏는 거야. 네가 무너지더라도 나는 잡아줄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꼭 말해줘야 해… 꼭…”

“응. 언니…”

나는 속으로 무슨 말이든 해보려고 문장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생기면, 꼭 말할 게 꼭..”

언니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내 손을 쓸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에게 그저 약속만 할 뿐이었다.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를 한 장 뽑아 건네주었다. 건넨 휴지가 언니의 살결 위에서 젖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새에 찾은 문장 하나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언니, 그런데 나... 말할 게 있어. 나는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어. 왜 사람이,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나는 언니와 다르게, 내 안에 사랑이란 게 없는 사람일지도 몰라.”

언니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세진아. 내가 가족을 언제나 사랑하는 것 같아?”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 엄마가 가끔 미울 때도 있고, 아빠는 더 자주 미워. 너랑 혜진이는 드물긴 하지만, 그만큼 깊게 미워. 가끔 모른 척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언니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묘하게 단호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사랑과 미움과 무관심이 이렇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언니는 그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이겨냈기에, 우리의 곁에 있는 걸까.

“그런데 나는 왜 언니가 모두를 사랑하는 것 같지?”

내 이어지는 물음에 언니가 웃었다.

“그렇게 보여? 그렇다면 나는 모두를 단지 미워만 하는 건 아니란 뜻일 거야. 세진아, 나는 무심한 네가 야속할 때도 있지만, 지금 이렇게 내 옆에 있으니까 고마운 마음도 들어. 오늘 같은 날도 있으니까. 결국 나는 혼자보다는, 너와 함께 있는 게 좋은 것 같아. 이게 내 사랑인가 봐.”


나는 언니의 말을 가만히 마음에 담았다. 그럼, 언니의 사랑은 꼭 언제나 따뜻하고 완벽한 게 아니라, 미움과 야속함 사이에서도 피어나는 거야?

내가 언니의 말을 곱씹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내 손을 쓸고 있었다. 그 손길을 따라 내 안에도 알 수 없는 마음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그동안 언니는 우리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남몰래 품고 있었다. 우리가 미워도 완전히 멀어지지 않는 그녀의 사랑이 무엇보다 깊고, 단단했다. 그런 언니 곁에, 그 자리 그대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나는 언니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어유. 막내가 뭘 한다고. 그냥 지금처럼 옆에만 있어주면 되지."

언니의 말에 나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잠든 엄마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오래 보지 못한 사이, 엄마의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칼엔 희끗희끗한 은빛이 번지고,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왜,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엄마가 한순간에 훌쩍 늙어버린 것만 같았다. 타인이 되어버린 엄마의 얼굴과 다시 친해지기 위해, 나는 한참 동안 거실에 서 있었다.

그때, 잠든 엄마의 옆에 놓인 노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방문판매원 아줌마가 말했던 ‘엄마의 꿈’을 떠올리며 노트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볼펜 자국이 깊게 파여 있었다. “잘 파는 영업 사원이 되는 법 7가지”라는 굵은 제목 밑에는 발주처 주소, 고객 메모, 판매 목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잦은 덧칠과 지워진 흔적, 구겨진 모서리에는 엄마의 고단한 하루들이 눌려 있었다. 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장. 삐뚤빼뚤하지만 힘이 느껴지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 우리 세 딸이랑 마지막으로 크루즈 여행 가기! 내 힘으로 할 수 있다. 아자아자.


나는 엄마의 얼굴과 노트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어느새 밖이 어둑해졌음을 깨달았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시침은 자정을 넘어 다음 날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니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날과, 엄마가 한 뼘 더 늙어버린 날 사이에서, 나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우리 가족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든 건, 엄마의 일탈도 언니의 물음도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내 침묵만큼이나 관계를 더 굳어지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꼭 닫은 방문은 반드시 열어야만 하고, 나를 둘러싼 울타리를 받아들이는 날이 언젠가 필요했다. 아. 실은 그것이 다정함이라는 것이었던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방문을 여는 것이었던가. 이다지도 간단한 행위 하나만으로도, 울타리 안에 있으면 좋은 것들이 내게 오는 것이었나.


거실은 여전히 고요했고, 그 위에 소리를 내며 서있는 건 나뿐이었다. 오직 내 숨소리만이 몸의 밖으로 나와 또다시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뛰었던 가슴이 천천히 차분해졌다. 변해야 할 것은 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내게는 허무하게도 가장 마음에 드는 답임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처럼.




· 이 이야기는 현대 가족의 서사를 담은 허구의 소설로, 모든 인물과 사건은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본 작품은 1부 〈한강에는 금붕어가 산다〉, 2부 〈수관의 수줍음〉, 3부 〈해묘 군락〉으로 이어지는 연작 소설입니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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