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하, 초여름에 온 걸 환영해!

초여름은 어쩌면 내 안의 어린 감정들이 조금씩 움트는 계절이다.

by 지은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한 건 가을에서 초겨울로 이어지는 무렵이었다.

퇴사하고 좋아하는 하늘을 맘껏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던 나의 바람과 달리, 가을은 푹 쉬기엔 너무도 짧았다. 겨울이 무르익을수록, 점점 낮의 시계는 짧아졌고, 하늘은 점차 어둡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까?

그 겨울,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둑한 방구석에서 나는 매일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


이직을 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 차오르지 않았지만, 어쩐지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조급함은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추위를 피해 방구석이나 집 앞 카페에서 매일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나의 작은 경력을 차곡차곡 담은 그럴듯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기업부터 잠시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기업까지 도합 서너 번의 면접도 꾸역꾸역 보러 다녔다.


그렇게 어둑하던 겨울을 지나, 다시 창 틈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봄이 오고 나서야, 나는 이직 준비를 잠시 덮어두고 하늘을 보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가볍게 셔츠 한 장을 걸치고, 신림역부터 서울대입구역으로 이어지는 카페들을 줄기차게 찾아다니기 시작한 지도 몇 개월이 흘렀을까. 어느새 전에 본 적 없는 순수하게 어린잎들이 가로수 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따라 늘어서 있었다. 고개를 들어야만 보이던 초록은 집 앞 정자에도 공원의 잔디에도 내려앉았다. 멍하니 동네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초여름의 초록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옆에 앉은 엄마에게 중얼거리며 물었다.

‘원래 이 시기에 나뭇잎이 이렇게 아름다웠어?’

그러자 엄마는 내게 ‘이제 막 어린잎이 태어나서 그래.’ 하고 답해주었다.


그래. 이 계절은 초록이 이제 막 태어난 계절이다. 그래서 더욱 싱그러운 계절.




관악구에 소재한 집 근처의 보라매 공원에는 때마침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다.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초록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나는 매주 보라매 공원을 향해 산책을 나섰다.


공원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물은 단순하고 가벼웠다. 그저 텀블러, 우양산, 카디건, 돗자리, 책 한 권, 노트북이 담긴 가방이면 충분했다. 공원에 도착하는 시간도 역시 대중없었다. 어느 날은 태양이 가장 강하게 내리쬐는 한낮에 머무르기도 했고, 또 다른 날은 선선한 밤공기를 즐기기 위해 늦게 도착하기도 했다.


이런 외출은 나를 한없이 풀어지는 마음으로 이끌어주었다.


보라매공원.jpeg 보라매 공원 한쪽에 자리를 잡은 나


보라매 공원 근처에는 직장이 꽤 많다. 점심시간에는 잠깐의 산책을 즐기는 직장인들로 유독 붐비는 것을 볼 수 있다. 퇴사 후 시간 개념을 잃어버린 나는, 사원증을 매고 커피를 손에 든 채로 삼삼오오 모여 걷는 일행들을 마주치고 나서야 지금이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저 공원을 한가로이 거니는 나 같은 사람들도 많았고, 정원박람회를 위해 공원을 단장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백수였던 나는 안정적인 사무실로 돌아가는 직장인이 부러워야 마땅할 텐데, 어쩐지 그 틈바구니 속에서 내 마음을 두드리는 건 정원 관리사나 정원 설명사였다. 초록을 가꾸기 위해, 초록을 사람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계절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땀을 흘리는 일들이 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그러자 잠깐의 초록을 즐기고 다시 사무실을 향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일보다, 초록을 가까이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리고, 살아오던 리듬을 바꿨을 뿐인데,

저 일도 해봐도 좋지 않을까? 이 일도 내게 맞지 않을까? 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삶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이번 초여름만큼은 맘껏 내 삶의 리듬을 놓아보자고.

새로운 흐름에 나를 내버려 두자고.




그 해 초여름부터 나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는 대신 산과 들로, 햇빛이 잘 드는 2층 카페나 공원으로 출근을 했다. 초여름은 잠시 한눈을 팔기에 충분히 짧았으니까 핑계를 대기에 좋았다.


그렇게 맞이한 계절 속에서 나는 미래를 걱정하는 고질병을 내려놓는 법과, 삶이 가져다주는 행복들을 내 안에 채우는 법들을 조금씩 배웠다. 뜨지 않는 채용 공고의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는 대신, 길가에 핀 들꽃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져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흩날리는 이팝나무의 꽃가루가 집 앞에 소복하게 쌓이는 것을 체감했다. 친한 친구 안의 어머님의 직업인 숲선생님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숲의 체험 프로그램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가끔은 집 앞 정원 관리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곁에 앉아 한동안 지켜보기도 했다. 초록을 수집할수록, 내 삶은 버거운 감정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평온해졌다.


보통 초여름은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를 가리키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을 최대한 넓게 일컫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찾은 방법은 절기에서 따오는 것. 내가 이 책에서 말하는 초여름은 5월 5일 입하(立夏)부터 소만(小滿)과 망종(芒種)을 지나 하지()가 시작되기 직전인 6월 20일까지를 이른다. 이 시기엔 춥고 덥기를 반복해 매일의 날씨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맑은 하늘이 초록을 환히 비춰주는 계절이다. 큰 일교차와 매일 달라지는 기온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바깥 생활에서 초록을 관찰하기에 제격이다.


그렇다면 내가 겨울부터 가장 기다리는 날은 역시 초여름의 시작, 입하(立夏)이다.

여름에 들어섬을 뜻하는 입하는 양력으로 5월 5일이다.

이 날은 어린이날이자 초여름을 뜻하는 맹하, 초하, 괴하, 유하라고도 불린다.


그렇게 입하가 시작되면, 잎이 연둣빛으로 변한다.

어린잎들로 어느샌가 시야가 덮이면 여름이 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입하(立夏)는 내게 어린것들이 태어나는 날. 어린이날이다.

어린잎들과 함께 내 안의 어린 감정들이 조금씩 움트는 계절, 보이지 않던 삶의 새로운 방향들이 빛으로 일렁이는 계절.


그렇다면 이번 어린이날엔 외쳐보자. 이제 태어난 어린 마음들에게.

입-하! 초여름에 온 걸 환영해.

목요일 연재
이전 01화프롤로그. 초록의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