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지구 여행하려고 태어난 거니까

감사함 명상 에세이, 21일 루나 디톡스 #19

by 지반티카

이틀 사이 유화 세 점을 그리고 나니 발이 저절로 무너진다. 지하철에서 서서 가는데 신발 안에서 발바닥을 고르게 펴고 있기가 어려웠다. 어느 쪽으로 쏠렸는지도 느껴지지 않는데, 무너져 있음을 느끼니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다. 기분이 좋지 않게 되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은데 잡을 데도 없이 서 있자니 감을 수도 없고. 조금 더 지나자 기분도 모르겠고 너무 피곤해졌다. 호선을 갈아타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개찰구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한 정거장 남은 상태라 그냥 걸었다. 맛있게 생긴 떡을 사들고 서늘해진 거리를.


많이 늦게 끝나서 집에 오니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거지. 쉴 틈도 없이 저녁을 준비한다. 피곤해도, 밥은 먹어야 한다. 저녁에 글도 써야 하니까 말이다. 매일 연재는 또 왜 하겠다고 해가지고,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져 갈 때는 감각에 집중한다.


사각 채칼에 당근을 대면 사각사각 썰린다. 애호박은 뭉텅뭉텅 썰려 금방 없어진다. 손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물을 끓이고 취나물을 먼저 데쳐 건져둔 뒤에 채 썬 야채와 밥, 팽이버섯을 한데 담아 익힌다. 볶음밥은 손이 더 가니 하지 않는다. 게다가 기름은 이틀 내내 질리도록 다뤘으니, 몸 안까지 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까지. 물기를 꼭 짠 취나물을 들기름에 무친다. 데치기 전엔 끝이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부분이 있으면서도 둥글둥글해서 귀여웠는데, 데치고 나니 얌전해져서 기름과 잘 섞인다.


밥이 익혀지고 야채가 익어갈 때쯤 계란을 더한다. 두 번 구운 김을 싸 먹을 수 있게 네모네모로 찢고, 깻잎 장아찌를 반찬으로 올린다. 조리를 거의 하지 않고도 쉽게 푸짐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나를 위해서 매끼 좋은 밥을 해주고 싶지만, 오늘처럼 뭘 더 할 기운이 없을 땐 빨리 조리가 되면서 영양을 챙길 수 있는 쪽으로 준비를 한다. 맛이 있으니 되었다. 밥에 간장을 많이 넣고 비볐는지 짠맛이 주로 나기는 했지만.


기운을 좀 차리고 보니, 기분이란 것은 순식간에 어떤 이유로든지 나빠질 수 있다는 걸 더욱더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나빠지는 기분을 알아차리고 숨을 쉬지 않으면 비탈길에 굴러가며 불어나는 눈덩이처럼 나쁜 기분이 커진다는 것도.


오늘 기분이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된 과정을 돌아보니, 무언가를 잘함과 못함으로 구분하며 잘하지 못할 때 스스로 나무라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낮에 그림을 그리면서 답답해지고 기분이 안 좋아진 이유도도 돌아보면, 원작의 느낌을 확실히 살려 그리고 싶은데 그런 게 잘 안 돼서였다. 처음 모작을 시도해 보는 그림이니까 어려운 게 당연한데 말이다. 그리고 원작자를 존중하는 마음도 사라져 있다. 나야 이제 막 그림을 배워 그리기 시작한 거지만, 보고 그리는 그 작품들은 원작자들이 온생을 다 바쳐 그린 그림이지 않은가.


지하철에서도 그렇다. 잘 서 있을 수 없는 것은 열심히 그리고 나서 지쳐서 그런 건데, 잘 서 있지 못한 것에만 초점이 가 있는 것이다. 밥도 상황에 따라 맞춰 먹을 수 있는 건데, 간단히 먹으면 대충 때우는 것 같이 느껴지고 말이다.


오로지 보이는 것, 결과에 초점이 가 있었던 것이다. 나를 포함한 사람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져 있었고. 뭔가 슬렁슬렁해도 된다는 여유가 없기도 했다. 뭐든 잘해야 하고, 실수가 없어야 하고. 그렇게 해야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으니 촘촘하고 꼼꼼하게 일을 해내는 경향이 있는 것도 당연한데 말이다.


잘하고 못하고, 완벽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만드는 것에 매달리게 될 때마다 생각한다. 기계가 아니니 당연한 거라고.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애초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도 잘 그리기 위해서 한 게 아니라, 그리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시작한 것이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되지 않는 것도 좋고.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이다. 재밌어서 시작한 건데, 어느 순간 잘하려고 하게 되면서 재미가 없어지고 짜증이 나게 된다. 그럴 땐 솔직히, 감사함이고 나발이고 없다.


사실, 오늘 그림은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는 재미있었다. 집에서 못 그려서 이웃집 마당에서 그리는 그림을, 학원에서는 하루 동안 두 장도 그릴 수 있었으니 그것도 좋았고. 그렸으니 된 것이다.


가끔 태어나기 직전에 어떤 마음이었을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내게 선택권이 있었던 거라면, 왜 태어나길 택했고, 그것도 이 시대에, 이 성별로, 이 나라에...


구체적인 이유야 알 길이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구를 여행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이 행성에서, 이 시대를, 이 성별로, 이 나라에서 살아보기를 택한 거라면, 그래서 태어난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홀가분해진다. 뭘 할 때는 그걸 경험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항상, 또는 끝까지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든다. 정 하기 싫으면 중간에 경로를 바꿔도 괜찮다는 가벼움도 생긴다.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줄곧 해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을 지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 생각이 의외로 큰 힘이 된다.


'뭐, 지구 여행하려고 태어난 거니까.'


Earth Traveler.png


무엇보다 잘하지 못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다행이다. 일을 잘하지 않아도, 좋은 딸 좋은 학생이 못 되어도, 세상이 끝나지 않을뿐더러 나를 벌하는 사람도 없다. 벌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서 나를 나무라는 목소리이다.


물론, 이 글의 연재는 끝까지 할 예정이다.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생각보다 21일은 빨리 간다.




| 당신을 위한, 당신의 명상 |


지금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숨을 쉬어보세요. 코로 들어오는 숨의 느낌, 온도를 느껴봅니다.


미간에 힘을 풀고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 때, 숨이 더 잘 쉬어지는지도 느껴보세요.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움직이는 갈비뼈와 배를 느껴봅니다.


눈을 뜨고 생활하는 동안에는 몰랐던, 몸 안의 공간을 느껴보세요.


몸과 마음이 모두 고요해지는 순간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어 보세요.


그리고, 고요함이 찾아오면 원하는 만큼 그 상태에 머무릅니다.



하트를 꾸욱 눌러 출석 도장을 찍으세요.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명상이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는 명상이 아닌, 명상 그 자체를 경험하고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찾아내신 보물 같은 감사함댓글로 나누어주셔도 좋습니다. 저에게는 연재를 이어가는 힘이 되고, 다른 독자 분들에게는 이런 부분에도 감사할 수 있구나, 하고 시야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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