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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원 Jiwon Kim Dec 31. 2023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크로스핏터와 트레일러너가 서로에게 묻다

  지난 4월 10km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인증샷을 찍어줄 사람이 어디 없을까 기웃거리던 중에 나보다 5분 먼저 들어와 주변을 기웃거리던 꼭 같은 처지의 또래 여자분을 만났다.


 서로 5년은 본 친구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서는 ‘다른 포즈요’, ‘메달 한 번 들어봐요, 아니 이쪽 말고 저쪽으로요’ 하다가 이윽고 사기적인 결과물을 얻어냈다. 결승선 근처에는 젊은이들의 러닝크루며 중장년층의 마라톤클럽 멤버들이 삼사오오 무리 지어 있었는데, 대회에 혼자 출정한 우리 둘은 씩씩하게도 그 한복판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헤어졌다.



 마라톤을 뛰는 날이 입사 이틀 전으로 잡아둔 바디프로필 촬영날과 겹친 덕분에, 몸이 부을까봐 10km를 뛰고서도 고작 두 모금의 물만 꼴깍꼴깍 삼키고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주린 배에 이리저리 힘을 줘가며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나니 「다음에 같이 한 번 뛰어요」라는 문자가 와있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냉큼 「진짜죠, 그럼 다다음 주에 같이 뛰어요!」라는 답장을 보냈다.


 신입사원의 비애랄지 입사 첫 주는 훌쩍 지나버렸고 만나기로 한 당일에도 예기치 못한 야근으로 약속 시간을 30분 늦췄다. 거기서도 또 5분을 늦어 약속 장소인 동작역 2번 출구로 내려가니, 전문 러너처럼 익숙하게 몸을 풀고 있는 언니가 한눈에 들어왔다. 언니가 평소 달리는 반포한강공원 잠수교 코스로 편도 3km를 찍고 돌아오기로 했다.


파이팅!


 1km쯤 달렸을까, 반대쪽에서 마주 보며 달려오던 두 남자가 눈앞까지 가까워져서는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큰 목소리에 놀라 어버버하고 있었는데, 언니 말로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격려차 “파이팅!”을 외치고 지나가기도 하는 거란다. 돌아오는 파이팅 소리의 부재로 머쓱하셨겠다 싶었지만 뒤돌아 그들을 추격해 파이팅을 외쳐주고 돌아올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던 방향으로 달리기를 이어갔다.


 달리면서 언니 이야기를 들어보니, 달리기로부터 얻는 해방감이 좋아 혼자 뛰기 시작한 지가 꼭 1년이 되었다고 했다. 러닝크루에도 몇 차례 나가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 날 때 가까운 곳을 뛰는 게 편해 주로 혼자 뛰고 있다고. 여기까지는 그다지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구나라는 의미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고는 계속 달리고 있었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는 트레일러닝을 시작했어요.”


 “산길 달리는 거 말씀하시는 거죠?”

 “네, 지형변화가 심한 산길 달리는 거요, 그거 맞아요.”

 애플워치 화면을 흘깃 보니 목표했던 편도 3km는 얼마 남지 않았고 잠수교 아래 완만한 오르막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일반도로나 평지를 달리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도대체 왜! 평소라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마음의 소리를 거친 숨과 함께 내뱉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아직도 숨이 남은 언니는 빙긋,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원님도 크로스핏 하신다면서요? 재밌어 죽겠다면서요! 우리 마라톤 뛴 날은 바디프로필도 찍었다면서요.”

 “네? 네, 그런데요.”

 “저는 지원님 보면서 왜 사서 고생하시나 생각했는데.”

 언니의 말이 내 귀로 들려온 그 순간 우리는 완만한 경사를 그리던 오르막길을 지나 평지 코스로 접어들었다.

 “아! 그래서들 하시는 거구나.”

 턱 막혔던 숨이 곧 트여왔고 내내 찡그리고 있던 내 얼굴도 이내 밝아졌다.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 라는 질문은 그 어떤 ‘쓸모’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일에 굳이 왜 힘을 들여가며 하는가 하는 의심 어린 시선에서 나온다. 목적지향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과 선택 앞에서 양(+)과 음(-)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는 습성을 떨쳐버리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서, 우리는 이걸 하면 누가 알아줄까, 여기서 뭘 얻어갈 수 있을까 따위를 묻고 답하느라 한 자리를 맴돌곤 한다. 그렇게 관성처럼 켜켜이 선택을 쌓아가다 보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일, 그 어떤 의미나 대가도 돌아오지 않을 일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발을 내딛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사서 고생’의 순간은 고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건강이랄지 재충전이랄지 행복과 같은 ‘이득’ 때문에 소중해지는 게 아니다. 외려 유용성과 목적성과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이기에 죽을 것처럼 가쁘게 들이쉬고 내뱉는 숨에서 유한한 삶의 꿈틀대는 생명력을, 지금 여기서 온전히 내게 몰두하는 놀라운 체험에서 진정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르막을 지나고 나니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 계획했던 것에서 500m를 더 달리자고 제안했고, 반환점을 찍고 다시 잠수교로 돌아오면서는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의 내리막으로 변해있어 ‘이 맛에 트레일러닝을 하는 건가’하고 아는 척을 하며 한결 수월하게 내달렸다. 마침 반대쪽에서 달려왔던 두 남자와 또 한 번 마주쳤는데 그들은 오르막에 숨이 가빠서인지 아니면 먼젓번의 ‘파이팅’에 반응이 없어서인지 다시 ‘파이팅’을 외쳐주지는 않으셨다.


 언니와 함께 달린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언니는 며칠 전 호우로 잠겨있는 잠수교 대신 트레일러닝 10km 코스를 달리고 왔다고 말해주었고 마침 나도 내일 백 번째 크로스핏 수업을 앞두고 있다. “왜 사서 고생을 하세요?”라는 물음을 주고받았지만 어쩌면 누구보다도 ‘사서 고생’하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우리다. 다음 트레일러닝 코스를 기대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을 언니에게, 손바닥과 무릎이 성할 날이 없으면서도 크로스핏을 쉬지 않는 나에게, 기꺼이 ‘사서 고생’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모두에게 “파이팅!”이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내가 만든 크로스핏 동작 포스터.
어깨가 없었는데
크로스핏을 하면서 어깨가 생겼습니다!



김지원 ─ 낮에는 짜여진 글쓰기로 돈을 벌고, 밤에는 숨가쁜 크로스핏으로 몸과 마음을 가꿉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정진해온 올해 초까지의 삶을 뒤로 하고, 쓸모와 무쓸모의 시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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