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헤아려지는 사랑이 있다

by 마리앤느

1월 첫 주 월요일,

파리에 몇 년 만에 눈이 많이 왔다.


2주간의 겨울 방학이 끝나고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간, 개학 첫날이었다.


시험공부를 하다 창밖을 보니

굵은 눈송이가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이 쌓인 센 강변

눈송이 너머로 보이는 에펠탑

평생 몇 번 못 볼 정도로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하얀 세상을 내다보는

내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세상 시시한 풍경 앞에서도

혼자 우와, 우와 아름답다 탄성을 내지르던 나였다.


매일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나아갈 때면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에펠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마치 여행객처럼 고개를 쑤욱 내밀던 나였다.


맨날 보는 파리 풍경...

그러나 구름 한 조각, 바람 한 결에 달리 보이는

신비한 파리 풍경을 애정하고 애정하던 나는


어쩐지 평생에 몇 번 보지 못할

눈이 쌓인 파리 풍경 앞에서는

휴우....

즐거운 탄성 대신 걱정 가득 한숨을 내쉬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수영 수업이 있는 딸은

추워서 수영이 싫다며 아침부터 눈물을 보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날씨를 핑계로 수업을 빼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눈이 올 정도로 춥구나

그리고 하나도 따뜻하지 않은 수영장 물속에서

우리 딸은 힘겹게 수영을 하겠구나

이 추운 날씨를 딸아이는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닿자

애처로운 마음이 깊어졌다.



이번엔 오른쪽 팔목에 깁스를 하고

처음 등교한 아들 생각에 마음이 아려왔다.


하필, 눈이 왔다.

익숙하지도 않은 한손잡이 생활

첫날부터 눈이라니...


엄마의 부축 없이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힘겹게 걷고 있을

아들의 모습이 그려지자

한숨이 포옥 나왔다.



담요를 들고 딸아이에게

오른팔을 뻗어 내어 주며 아들 녀석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


그러나 그 마음과 달리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창가에 서서

어쩌나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는 것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걸까.

누군가의 아픔이 내 것이 되고

그이의 고통이 내 것처럼

온 마음과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


누군가의 안녕을

내 안녕보다 더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것.


눈으로 덮인 세상 한가운데서,

내 마음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까맣게 타들어 갔다.


겉보기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창 밖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천국 같은 이 순간에


내 마음은 마치 형벌이라도 받고 있는 냥

새까맣게 타 들어가다

재가 되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들은 엄마가 지들을 이렇게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걸 알까?


아니, 아이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다음 날, 잠시 장을 보러 나갔다가

쌓였던 눈이 거의 녹은 것을 보았다.

그제야 까맣게 타들어 가던 내 마음도 함께 녹는다.


아이들이 보낼 하루가

부디 힘겹지 않기를 바라던

그 간절한 마음,

그리고 그 마음 때문에

스스로 짊어졌던 형벌은

그렇게 눈과 함께 녹았다.



누군가에겐 아름다웠을

한 겨울의 꿈같은 하루가

나에겐 돌을 굴리고 또 굴려야 했던

시지프스의 형벌을 지고 있던 하루였다.


휴우,

녹은 눈 사이로

이제야 그 돌을 내려놓는다.






문득, 엄마가 떠올랐다.


해가 질 무렵이면 난간에 서서

내가 돌아오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얼굴.

'아가씨, 야는 아가씨 딸이야...'

시한부 판정 앞에

자신의 삶이 반토막 난 것을 슬퍼할 겨를 없이

시누이에게 내 딸이 당신 딸이라고

서둘러 맡기며

엄마를 잃고 살아가기엔

어리디 어린 나를 위해 애타했을 그 마음.



문득, 할머니가 떠올랐다.


시집가기 전 날밤,

네 친정은 여기다, 네 친정은 여기다

부모가 없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의지할 곳 없이 스스로를 외롭게 할까

애가 타서 눈물을 훔치며

밤새 내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시던

그 손길.



그건 어쩌면 사랑이었을까.



나 또한 그렇게 나를 위해 준 이들의 사랑,

꿈에도 몰랐으나 늘 거기에 있었을

수많은 간절한 마음을 입고

여기까지 자라왔구나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진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고,

사랑을 배워 갈수록

뒤늦게 헤아려지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은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네받고, 품고,

또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서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내 마음 덕분에,

그렇게 이미 내게 흘러왔던 사랑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저 애가 타던 그 순간에도

사랑은 이어지고 또 흘러간다.

그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

늘 그렇듯이.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