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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Dec 14. 2020

모든 게 엄마 탓인줄 알았다


“엄마 우리 집에도 트리 있으면 좋겠다”


어느 날 딸이 툭 던진 말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나는 작은 트리와 장식품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금요일 저녁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 함께 신나게 트리를 꾸몄다. 프랑스는 이맘때면 온 도시가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 찬다. 학교에서도 함께 트리 장식을 하고, 물론 거의 대부분의 가정들이 트리를 꾸민다. 그러니 트리가 갖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도 그럴 만한 셈이다.



“우와~~~”

이 작은 트리가 뭐라고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양이다. 다 꾸미고 불을 켜자 아이들이 입을 쩍 벌리고는 트리 앞을 떠나질 못한다. 프랑스 살면서 세상 화려한 트리도 많이 본 녀석들이 그래도 제 손으로 꾸민 트리가 세상 제일 아름다운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소박하고 앙증맞은 트리 앞에서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트리 앞을 떠나지 못하고 불을 켰다 껐다, 인형을 여기 걸었다 저기 걸었다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의 어린 시절이 오버랩된다.


그랬다. 나도 저 무렵 트리가 갖고 싶었다. 그 시절은 트리 꾸미는 일이 그닥 흔하지도 않았는데도 어디선가 본 뒤로 늘 그게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엄마와 그런 걸 해 본 기억이 없었다. 더 슬픈 것은 아직 초등학교도 채 들어가기 전인 내가 엄마에게, 딸이 내게 그랬던 것 마냥 “엄마 나 트리 갖고 싶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내 눈에도 인생살이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 엄마였기에 나의 소박한 원함까지 얹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너무 일찍 어른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30년이 흐르고서야 작은 트리 하나를 집에 들였다. 불 켜진 그 트리 앞에 서니 30년의 세월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자꾸만 6살 무렵의 내가 튀어나온다. 애들 마냥 자꾸 불을 켜놓고 멍하니 바라본다. 지나가다 불 켜진 트리를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러나 동시에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이게 뭐라고 여태껏 왜 이걸 못 해 봤을까...







살면서, 특별히 아이들을 기르면서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만약 그때 우리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해 줬더라면... 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를 텐데...’



대학에서 교육사회학 수업을 듣다가 ‘문화 자본’이 대물림된다는 이론을 보고서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랬다. 나는 그 흔한 영화관, 그 흔한 박물관 한 번을 부모님과 함께 가 본 적이 없이 자랐다. 내가 늘 아쉬웠던 것은 그 대목이었다. 먹이고 입히는 것 외에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없는 부모님 아래에서 살면서 나는 늘 뭔가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늘 먹고사는 일로 고군분투하는 부모님의 피로한 인생을 관찰하면서 자란 나에게 삶은 거대하고 무거운 숙제와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였는지 어린 내게도 인생은 쉽지가 않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 나는 소금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어떻게 내 갈증을 해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꼭 인생 같이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는 더했다. 살뜰하게 챙김 받아 보지 못했기에,  또 쉽사리 원하는 걸 말하거나 떼써본 기억이 없는 내가 아이들을 살뜰하게 챙긴다는 것은 산수도 못하면서 수학 문제를 푸는 격이었다. 늘 진을 빼고 애를 써야만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쓰고도 그닥 잘 해내지는 못했다.


차라리 내게 부족했던 것들을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일은 편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어린이 책을 많이 사준다거나,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 편 보여준다거나, 이렇게 트리를 만든다거나 하는 종류의 것 말이다. 그러나 내가 받아보지 못한 정서적 교감을 아이들에게 주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애를 써 보려는 마음과 달리 행동이 툭 나가는 순간이면 ‘도대체 엄마는 나를 어떻게 키운 거야...’라는 모진 불평이 쏟아지곤 했다. 곧바로 후회하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런 게 다 엄마 탓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피곤하고 감정이 소진되면 클래식을 찾아 듣는 내가, 그날도 어김없이 쇼팽의 녹턴이라는 곡을 찾아 듣다가 문득 나는 어떻게 피아노 클래식을 즐기게 되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어려운 형편에도 엄마가 유일하게 나를 몇 년 동안 빠짐없이 보낸 곳이 있었는데 그게 피아노 학원이었다.


물론 피아노에 별다른 재능도 흥미도 없던 나는 대충 건반을 두드리고 친구들과 노는 게 일이었지만 서당 개가 풍월을 읊듯 5년이나 다닌 그 피아노 학원이 나에게 하나의 취향을 만들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그래도 나에게 만들어 준 문화 자본이 하나는 있네’ 하고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다음 생각이 떠오르자 그 웃음은 눈물로 바뀌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피아노 건반을 한 번 만져본 적이나 있었을까?’



엄마가 언젠가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그려오라는 숙제에 새장 옆에 피아노를 그리고 또 새장 옆에 피아노를 그리고, 또 새장 옆에 피아노를 그려 갔더니 선생님께서 여긴 시끄러워서 어떻게 살겠냐고 했다고. 온 가족이 웃고 넘어간 그 이야기가 그날따라 가슴에 사무친다.



어쩌면 엄마는 한 번도 만져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는 그러나 늘 동경해 마지않았던 그것을 내게 주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없는 형편에 그것도 속셈 학원이 아닌 굳이 피아노 학원을 보냈던 엄마의 그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평생 먹고 사느라 인생을 즐기는 법 모르고 살아왔지만, 너 만큼은 살기 위해 살지 말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보고 듣고 누리면서 부디 행복하게 살거라....’



엄마의 간절함이 내 귀에 들리는 것만 같다.


내겐 너무나 부족했던 그 모든 것은 사실은 엄마에게는 엄마가 줄 수 있는 전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엄마도 누려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몰랐는지도 모르겠다. 나처럼 애를 쓰고 진을 빼며 겨우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이 이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마가 받아본 것보다 더 나은 것을 내게 주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다. 피아노 건반 한 번 두드려보지 못한 엄마가, 그러나 새장 옆에 피아노를 놓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미래를 꿈꿨던 엄마가 내게 음악을 선물했다. 부디 엄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며 엄마는 내게 그것을 주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원망을 거두어들여야겠다. 그리고 엄마의 바람처럼, 누구에게나 무겁고 고된 인생살이 가운데에서도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며 그것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내가 받아보지 못해 주기가 힘들지만 그래도 애를 쓰고 진을 빼며 조금 더 사랑해 봐야겠다. 그래서 결국은 나도 더 좋은 것 하나쯤은 내 아이들에게 남겨 주고 싶다.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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