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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Jan 26. 2022

오래된 얼룩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매일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엄마는 매일 같이 주방에서 닦고  았다.

싱크대를 닦고, 냉장고를 닦고, 가스레인지를 닦고,

아침 먹고 닦고, 점심 먹고 닦고, 저녁 먹고 닦고...


나는 그런 엄마가 신기했다.

방금 먹고 돌아서면 또 밥을 해야 할 터이고,

그럼 또 얼룩은 생기고 말 것인데,

뭘 저렇게 닦고 또 닦을까.


조금 두었다 하루를 마치기 전에 한 번에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좀 두었다가 닦아야 할 만큼 더러워진 뒤에 말끔하게 치우면 될 일 같았다.


그런 내 눈에 부지런히 닦고 돌아서서 또 닦는 엄마의 그 성실함은 때론 미련하게 보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나 역시도 주방에 입성했다.

평생 나와는 상관없는 공간처럼 여기던 주방에서, 기껏해야 과일 하나 씻어 먹을까, 라면 하나 끓여 먹을까 하던  주방에서 하루  끼를 고스란히 차려 내야 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끼라니... 요리를 하는 것도 막막했지만, 레시피를 뒤져가며 서툰 솜씨로 음식을 만들고 나면, 주방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손질된 채소 껍질이 어지러히 널려 있고, 야채 손질하랴 간을 맞추랴 잠시 놓친 틈에 끓어 넘친 국물의 자욱이 가스레인지에 고여 있거나 진한 얼룩을 남기곤 했다.


당장 급한 설거지를 하고 음식쓰레기까지 처리하고 나면, 그만 몸이 노곤해졌다.

끓어 넘친 국물로 얼룩진 가스레인지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늘은 여기까지... 혼잣말을 내뱉으며 행주로 대충 훑어내어 씻어 널고는 엉덩이 붙이고 앉기 바빴다.


그러다 어느 날 손님이라도 초대하면 나는 바빴다.

밀린 얼룩들을 제거하느라 각종 독한 약들을 뿌려가며 대청소를 해야 했다. 이 얼룩들은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까지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냐며 그때 내가 뭘 해 먹었더라 구시렁거리며 쇠수세미에다 솔까지 동원해서 가스레인지 청소를 했다. 그러나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그 수고에도 불구하고 얼룩덜룩했다. 연년생에 가까운 두 아이를 기르는 집에서 살림까지 완벽하긴 어렵지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왔다.



하루는 어떤 분 댁에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분의 주방에 들어가 보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주 오래 쓴 가스레인지라는데, 겨우 몇 년밖에 안 쓴 우리 집 가스레인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갈하고 깔끔했다. 그분이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하겠노라며 찌개를 보글보글 끓이고 계셨는데 간을 보다 국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행주로 얼른 닦아내셨다. 그때, 불현듯 하루 종일 주방에 서서 닦고 또 닦아내던 엄마의 모습과, 하도 닦아서 광이 난다며... 파리가 날아와도 미끄러워 앉지를 못하겠다며 놀리던 내 모습, 그리고 깨끗하던 가스레인지가 떠올랐다.



그랬다. 아주 작은 이물질이 튀었을 때, 그냥 재빨리 닦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혹여 생각지 못한 일로 콸콸 넘쳐흘렀다 할 지라도, 얼른 그때 돌아보고 닦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락스 같은 독한 약물을 쏟아부을 일도, 도대체 이 얼룩은 언제 무엇 때문에 생긴 거냐며 투덜거릴 일도, 얼룩덜룩 각종 얼룩을 안고 살아갈 일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아주 간단하지만 큰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은 살림의 기술을 익혔고,

그렇게 나는 엄마를 조금 더 이해했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요 근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 속에 이렇게도 많은 얼룩이 있는가.



누군가의 사심 없는 말 한마디가 아프게 가슴을 찔러올 때, 별 일도 아닌 일로 고뇌하고 근심할 때,

남들은 지나칠 만한 일도 이상하게 민감하게 다가올 때마다...


나는 내 마음속에 굳어진 얼룩들을 본다.

딱딱하게 굳어진 그 얼룩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스레인지를 닦아대던 그날처럼 혼잣말을 한다.

'도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제 와서 그 엉킨 감정들을 돌이켜 보면서

그 얼룩들이

사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받아 들여야 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이었다는 걸,

 상처들이 제때 돌봄 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한   멋대로 굳어져 딱딱한 얼룩이 되고 말았다는  마흔가까워 오는 이제야 깨닫는다.



이미 너무나 오래된 얼룩을 깨끗하게 씻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래도 해 보려 한다.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사랑이라는 약으로 치료해 보려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눈물이 날 땐 울고,

쓰고 싶을 땐 쓰고,

걷고 싶을 땐 걸으면서,

그러나 끝내 포기하지 않고 가보려 한다.


그렇게 내가 나의 지지자가 되어주겠노라

다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모르고 살아온 날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얼룩을 그냥 두지 말아야겠다.


매일 내 마음을 돌아보며

매일 내 일상을 돌아보며

매일 내 관계를 돌아보며


누군가 무심코 던진 돌멩이 걷어내고,

누군가 무심코 튀긴 구정물 닦아내며,

그것이 내 마음에 굳은 얼룩이 되지 않도록

가만히 가만히 사랑으로

내 마음을 매일 닦아주리라.


더는 이렇게 얼룩 밭으로 남겨두지 않겠노라

고백한다.


이렇게 이 글을 쓰며,

다시 첫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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