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낯선 프랑스 생활이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 해를 시작할 때면 무거운 마음이 몰려왔다.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감사했다.
그래도 감사할 만큼의 작은 변화들이 찾아졌다.
그러나 나아가야 할 한 해를 바라보면
마음이 묵직했다.
또 어떻게 이 너르고 깊고 질척이는 한 해를
견뎌내야 할까... 휴우 갑갑했다.
한국에서는 달랐을까? 아닐거다. 삶은 늘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고,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다만 말이 조금 더 편해서 불필요한 긴장이야 없었겠지만.
가만히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아 그거구나.
바로 돈 걱정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프랑스에 와서 그래도 나름 일을 구해서 한국어 교사로 일을 해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매달 비싼 월세를 꼬박꼬박 지불해야 하는 전세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한국보다 훨씬 물가가 비싸서 뭣하나 시원하고 개운하게 퍽퍽 살 수 없는 상황 중에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올해 9월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나니 일을 정리해야만 했다.
참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내린 결정이었고, 인생의 다음 스텝을 위해서 견디며 지나가야 할 시간이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흔들린 까닭은 일한 만큼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
뭐니 뭐니 해도 머니 때문이었다.
그랬다. 돈을 포기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하기엔 우리의 생활이 그리 안정되어 있지 못했다. 수입이 줄면 실제적으로 생활비의 어느 부분을 깎아야 하고, 그것은 분명하고도 실제적인 불편함으로 삶을 옥죄어 올 것이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고 고단한 일이었다.
하루는 오랜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로 시작해서, 친구는 그래도 프랑스에 사니 좋지, 애들은 프랑스어가 많이 늘었지, 등등 내가 직면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친구의 기대들을 내게 넌지시 물어왔다.
프랑스에 사는 것은 좋기도 했지만, 불편하기도 했다. 아니 불편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프랑스어가 많이 늘긴 했지만(듣기가), 도무지 얼마나 더 노력해야 또 어떤 노력들을 해야 프랑스인과 불편함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를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평생 상상해보지 않았던 높은 월세에다 높은 물가 때문에 요즘 돈 걱정까지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친구에게 늘어놓기엔 우리 사이에 8시간의 시차와 지구 반 바퀴쯤의 거리가 존재했고,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카톡이 그리 좋은 도구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외국 생활이 그리 쉽지는 않은데, 아마 너였다면, 밝고 쾌활한 너였다면, 훨씬 잘 해냈을 거다, 정도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지난 한 해도 고생 많았다고 도닥이고 문자를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있지, 혹시 생각나면...
네가 믿는 그 하나님께 내 기도 좀 해줘.
나 지금 좀 많이 힘든데...
이 시간 잘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한 번도 그런 내색을 비친 적이 없던 친구가,
오랜 소꿉친구가 남긴 무거운 카톡 한 통에 가슴이 쿵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좋은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언제고 네가 힘들 때, 정말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 그땐 언제든 연락하라고,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사랑한다고, 힘내라고. 그저 그렇게 마음을 담아 겨우 답장을 할 뿐이었다.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아... 지금 한국은 새벽 3 시구나....
나는 분주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이었지만, 친구는 무슨 문제를 가슴에 안고 잠을 뒤척이던 중이었다. 그리고 불현듯 내 생각이 나서 문자를 했던 것일 거다. 저녁을 차리는 내내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잘 이겨내게 해 달라고. 홀로 너무 많이 외롭고 힘들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자꾸만 이런저런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어디 아픈가? 남편과 관계가 힘든가?
아이들 때문에 그러나? 시댁과 좀 불편한가?...
생각은 자꾸만 꼬리를 물었고,
'건강'과 '관계'라는 두 글자로 정리될 법한 걱정들이 몰려왔다.
누군가의 건강 또는 누군가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는건가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웠다. 그것은 정말로 힘든 일일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친구도 나처럼 몇 년 전 오랜 투병 생활을 하시던 엄마를 떠나보내야 했다. 그랬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무리해서 아파트를 샀었는데, 그 대출금 갚기가 너무 힘들다던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친구가 하는 일은 코로나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을 만한 일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혹시 돈 때문에 힘든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갑자기 휴우 하며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그랬다. 나도 그 걱정을 하며 살고 있지만,
사실 돈 걱정은 누군가를 잃는 일(존재론적으로든, 관계론적으로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좀 불편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좀 힘들지만 이겨낼 만한 것이었다.
좀 적게 가지고, 좀 적게 누려도, 여전히 내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며 살아간다면 행복할 수 있었다.
돈은 우리를 근심하게 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의지를 발휘해서 누리는 그 행복까지 앗아갈 수는 없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래 지나갈 만한 일이겠다. 그냥 마음을 다해 기도해줘야겠다.
그리고 친구에게 고맙다.
내려놓지 못했던 근심과 불안을, 그리고 욕심들 친구를 위해 기도하다 보니 이것들이 얼마나 별 것 아닌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가진 돈은 충분하지 않지만 내 삶은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기엔 충분한 조건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사할 게 훨씬 많다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건강하니 감사하고, 여전히 서로 사랑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오늘도 각자의 삶을 잘 마치고 돌아와 웃으며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
견뎌질 만한 부족을 보며 불평하지 말고
견뎌내게 할 만한 감사를 보며 감사해야지.
그러고 보니 돈 걱정은 참말로 걱정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