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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치 Oct 19. 2024

파워 내향형 인간, 등산 소모임에 가입하다

대부분의 소모임은 기혼자가 가입할 수 없다. 아마도 모임 내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함일 테다. 그러나 너무나도 순수한 목적을 가진 나에게는 그 조건이 참 아쉬웠다. 내가 모임을 가입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였다. 평일에 퇴근 후에 등산을 하고 싶은데 혼자 하기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혼자 ✕’가 적혀있지 않은 몇 개 안 되는 소모임을 ‘찜’ 해놓은 뒤, 몇 주간 고민을 했다. 


모임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인 사진이나 공지 내용 같은 것들은 가입을 한 뒤에만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모임을 가입한 뒤에 이것저것 살펴본 후, 너무 에너지 넘치고 친밀한 모임인 것 같으면 가입을 취소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르다 비교적 마일드한 분위기의 모임에 가입했다. 오픈카톡방 링크를 누르고, 채팅방에 들어가서 ‘안녕하세요’ 한마디 남기는 것이 왜 이리도 긴장되고 무서운지. 나에겐 그 절차가 정말 큰 산을 하나 넘은 것과 같은 과제였다. 며칠 동안 카톡방에 있어보니 별로 사담이 오고 가지도 않았고, 채팅방에서는 꼭 존칭을 써야 한다는 규칙도 잘 지켜지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엔 탈퇴하지 않고 9월 보문산 야등 일정에 ‘참석’ 버튼을 눌렀다. '후- 하.' 또 하나의 산을 넘었다. ‘참석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오는 것이 나에겐 너무 떨리는 일인, 나는 정말 극한의 내향인이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나는 속도가 느린데.. 민폐를 끼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너무 어색하진 않을까’,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이 시간이 불편하진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 남편이 툭 던진 조언이 큰 힘이 됐다. “어차피 오르다 보면 다들 말이 없어질걸?” 다들 힘들어서 말이 없어진다면, 어색하고 불편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취소하지 말고 한번 가보자. 


드디어 등산 당일. 설레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는 마음으로 약속장소 앞에 서서 ‘저 앞에 와있습니다!’라고 카톡을 남겼다. 그리고 과연 누가 일행일까,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날은 다행히 소수의 인원이 모인 날이었다. 서로 저녁 식사는 했는지, 등산은 얼마나 다녀보았는지, 여기까지 오는데 오래 걸리진 않았는지 등을 나누며 오르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땀이 주르륵주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말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일행이 고맙게도 나에게 안심되는 말을 건네주었다. 자신은 계속 일정한 속도로 올라가는 스타일이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갔다 할 테니, 혹여나 자신이 먼저 간다고 해서 ‘버렸다’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부터 눈치 볼 것 없이 헉헉대고, 서서 땀도 닦고, 숨도 돌리며 올라갔다. 혼자지만 혼자 가는 것은 아닌, 이 정도가 딱 좋았다. 혹시나 내가 무슨 일을 당해도 금방 발견될 수 있을 테니..! 


평소 나는 우중산행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그날 산행 내내 비가 왔다. 투두둑 투두둑 나뭇잎이 비 맞는 소리를 혼자 즐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비에 젖어 잎들은 녹색이 더 짙어지고 반짝거렸다. 하지만 오를수록 우산을 들 힘이 점점 더 없어졌다. ‘아.. 이걸 버려, 말아?’ 싶은 순간이 수십 번도 더 찾아와 왔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것만 아니면 쫄딱 젖든 말든 그냥 비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에서 오들오들 떨며 쉰내를 풍기지 않기 위해서 우산을 다시 부여잡고 산을 올랐다. 아무래도 방수기능이 있는 모자 정도는 사도 좋겠다, 생각했다. 


위를 올려다볼 때마다 계단의 끝이 또 계단이었는데,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서 보니 계단 끝이 하늘이었다. 정상이 가까워온 것이다. 짧은 산행 코스라 생각보다 금방 정상에 올랐다. 정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온 주변이 까만 가운데에 누군가 별빛을 가득 뿌려놓은 것 같았다. 비가 와서 구름이 산 중턱에 낮게 깔려있는 것도 운치 있었다. 산 주변에는 야구장이 있었다. 야구 경기가 있던 날이라 사람들의 신나는 응원소리, 함성소리가 바람을 타고 오는 듯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발밑에 있는 별밭을 보자면 이걸 취미로 가진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땀으로 축축해진 손수건도 마르고, 머리카락도 말라서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습한 날씨에 땀도 너무 많이 나고 힘이 들었고, 도대체 아무리 짧은 코스라도 나는 하지 못할 것만 같았었다. 내가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온몸에 뒤집어쓴 듯한 꼴을 하고 비틀대며 오르는 동안 라디오를 들으며 마실 마냥 내려오시는 아빠 연배정도의 아저씨들을 보면 창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도시의 은하수를 보는 나의 마음은 달랐다. ‘좀 헉헉 댈 수도 있지. 땀도 좀 많을 수도 있지! 이런 걸 좋아하고,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나, 좀 멋있는데?’라는 자신감이 치솟았다. 거기에 ‘소모임도 나쁘지 않네!’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사실 요즘 들어 부쩍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낸 사람보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잘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대부분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조금 더 조심하고, 되도록 피상적인 ‘좋은’ 대화만 나누기 때문이다. 대화 중에 설사 이해가 안 되거나 불쾌한 순간이 생기더라도 나와는 크게 관련된 사람이 아니니 감정적으로도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도 좋다. 굳이 서로 이해할 필요 없고, 많은 것을 맞춰야 할 필요도 없고, 긍정적인 부분만 공유하고 기분 좋게 헤어지는 가벼운 관계가 편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오랜 세월 친하게 지냈어도 모든 것이 잘 맞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이고, 오랜 친구라면 어쩔 수 없이 그 타이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실망할 일이 더 많아진다. 물론 이런 소모임 안에서 점차 가까워져서 친구가 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내향’이라는 성향에 ‘미성숙’이라는 특성이 더해진 나라는 인간에게 한정되는 이야기이다. '잘 모르는 사람'과 함께 등산하는 것이 편안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내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에도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나도 굳이 어떤 말을 하기가 어려울 만큼 체력적으로 힘든 상태임을 알기에 오히려 침묵이 배려가 되었다.


하지만 파워 내향형 인간인 나에게는 참여 인원이 더 많아진다면 그것은 또 다른 퀘스트가 될 것이다. 그래도 도전해 볼 의향이 있다. 참 좋았다! 야간 등산, 등산 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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