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아마도 그리워하다 죽는 일인 것 같다. 청년 시절에는, 홀로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가족과 함께 수박을 잘라먹고, 어머니가 감자를 삶아주고, 가족 다같이 모여 월드컵 경기를 보러 가고, 보호받으며 책상 밑에서 레고를 갈고 놀던 시간이 참 그리웠다. 그래서 자주 고향에 찾아가기도 했다. 집에서 강아지들과 함께 밤새 영화를 보고, 부모님과 마트를 가고, 아구찜을 먹으러 갔다. 그렇게 그리운 마음을 달래면서, 그 시절을 또 떠나보냈다.
얼마 지나서는, 이십대의 초반 혹은 중반 무렵이 그리웠다. 비교적 자유로운 마음으로 공부하고, 글쓰고, 여행을 떠나곤 하던 날들의 마음이라는 게 그리웠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을 참으로 사랑했고, 영화 속 이야기들이 삶이 될 거라 믿었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말든, 책들을 쌓아놓고 읽던 날들이라는 게 아쉬웠다. 그렇게 대학원까지 가면서 청춘을 유예하고, 유예하려다가, 어느 시점부터 현실을 받아들였다. 다시 또 살아가야 할, 내 앞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내와 매번 같이 소파에 붙어 앉아 있을 때면, 옛날을 그리워하기 바쁘다. 연애하던 시절,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이가 신생아이던 시절, 매주 바닷가를 찾아가던 시절들이 온통 그립다며 사진을 뒤져보곤 한다. 그토록 소중했던 시절들을 함께 추억할 사람이 곁에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라고 자주 생각한다. 인생이 그리워하다 죽는 일이라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일은, 함께 그리워하며 살다가 함께 죽는 일일지도 모른다.
주말을 보내고 나면, 아이는 종종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고 한다. 평소에는 깨어있는 동안 하루 두어시간밖에 못만나지만, 주말은 내내 같이 있으면서 많이 놀아주는 아빠가 좋아지나보다. 그렇게 아이랑 정신없이, 끊임없이 놀고 싶어하고 말하고 싶어하는 아이를 상대하면서, 아이를 안아주고, 아이랑 달리고, 아이와 장난감을 갖고 놀고 난 이후의 월요일은 어딘지 그리움으로 가득 차게 된다. 깔깔대며 웃는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그렇게 아이를 중심에 두고 단단하게 구성된 우리 셋의 사랑이라는 게 참으로 든든하게 느껴져서, 언젠가 이 시절을 그리워하다 죽을 거라는 걸 미리 알아버린다.
어느덧 오지 않을 것 같은 서른을 훌쩍 넘기고, 마흔을 향해 가는데, 정신 차려 보면 또 쉰을 향해가고 있을 것 같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계속 그리워할 날들만 쌓아가다가, 언젠가 생을 마감할 날이 와 있을 듯하다.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태도가 하나 있다면, 그리워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되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삶을 살아내는 다른 방법은 없기도 한 것이다. 그저 더 많이 그리워하다 죽을 수 있도록, 소중한 날들을 그만큼 더 많이 매일 쌓아나가고, 더 많이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잘 살아내는 방법일 것이다.